이진빈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호조정랑, 구성부사, 평양서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응림(應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8년(명종 13)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전주
주요 관직
호조정랑|구성부사|평양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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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호조정랑, 구성부사, 평양서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응림(應霖). 여양군(呂陽君) 이자겸(李子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대(李薱)이고, 아버지는 이노(李櫓)이며, 어머니는 조빈(趙璸)의 딸이다. 이양(李樑)의 조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1600년 호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헌납을 거쳐, 지평을 역임하던 중 임해군(臨海君)을 탄핵하여 제거하는 데 앞장섰고, 경연·궁금(宮禁: 궁전)을 엄하게 해야할 것 등의 긴 소를 내었다.

이어 여주목사 이희원(李希愿), 원주목사 안대진(安大進)의 파직 등을 주장하였으나 위인이 용렬하고 거칠어 간쟁의 관직에는 합당하지 못하다는 사신의 평을 들었다. 그 뒤 호조정랑, 장령·전적을 역임하면서 삼명일(三名日: 와의 탄신일, 정월초하루 및 동지날 등의 세 명절)에 진상(進上)하는 방물을 감해주도록 요청하였다.

선공감정(繕工監正), 헌납을 거쳐 1602년에는 평안도구황어사(平安道救荒御史)로 파견되어 여러 고을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이어 구성부사(龜城府使)로 제수되어 목민 업무를 담당하다가 몇 개월 후 사섬시정(司贍寺正)에 제수되어 중앙 관직에 복귀하였다.

그 뒤 1604년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재직시 정성을 다해 백성을 다스린다는 평안감사 김신원(金信元)의 추천으로 이듬해 공조정랑에 제수되었고, 그 뒤 성균관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실록』 편찬 당시 춘추관편수관을 지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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