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응림(應霖). 여양군(呂陽君) 이자겸(李子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대(李薱)이고, 아버지는 이노(李櫓)이며, 어머니는 조빈(趙璸)의 딸이다. 이양(李樑)의 조카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1600년 호조정랑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헌납을 거쳐, 지평을 역임하던 중 임해군(臨海君)을 탄핵하여 제거하는 데 앞장섰고, 경연·궁금(宮禁: 궁전)을 엄하게 해야할 것 등의 긴 소를 내었다.
이어 여주목사 이희원(李希愿), 원주목사 안대진(安大進)의 파직 등을 주장하였으나 위인이 용렬하고 거칠어 간쟁의 관직에는 합당하지 못하다는 사신의 평을 들었다. 그 뒤 호조정랑, 장령·전적을 역임하면서 삼명일(三名日: 와의 탄신일, 정월초하루 및 동지날 등의 세 명절)에 진상(進上)하는 방물을 감해주도록 요청하였다.
선공감정(繕工監正), 헌납을 거쳐 1602년에는 평안도구황어사(平安道救荒御史)로 파견되어 여러 고을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이어 구성부사(龜城府使)로 제수되어 목민 업무를 담당하다가 몇 개월 후 사섬시정(司贍寺正)에 제수되어 중앙 관직에 복귀하였다.
그 뒤 1604년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재직시 정성을 다해 백성을 다스린다는 평안감사 김신원(金信元)의 추천으로 이듬해 공조정랑에 제수되었고, 그 뒤 성균관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명종실록』 편찬 당시 춘추관편수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