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백(經伯). 할아버지는 이정량(李廷亮)이고, 아버지는 이용(李墉)이며, 어머니는 정형진(鄭亨晉)의 딸이다.
생원을 거쳐 1753년(영조 29) 동생 이진형(李鎭衡)과 함께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57년 검열(檢閱)로 처음 부임하였다. 1761년 지평으로서 임금이 친국(親鞫)하는 일로 명령이 있었으나 패초(牌招: 왕이 패를 내려 신하를 부르던 일)를 어겨 삭직당하였다.
1762년 헌납으로 재임명되었으나 사헌부지평으로 있으면서 협잡(挾雜)으로 계사(啓辭: 논죄에 관한 것을 왕에게 올리는 문서)를 꾸몄다 하여 또 다시 삭직당하였다. 1763년 장령으로 발탁되어 여러 해 동안 헌납·보덕·집의를 역임하였다. 1769년 사간으로서 문신의 제술(製述)에서 수위를 차지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고 혜경궁(惠慶宮)에게 존호(尊號)를 더하고 높일 때에는 대거(對擧) 승지를 맡아 보았다. 1784년(정조 8) 한성부우윤에 이르렀으나 재계(齋戒)하는 날을 맞이하여 도성안의 관부(官府)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풍악을 연주한 일이 있었는데도 이를 능히 단속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그의 동생 이진형(李進衡)은 예조 참판·경기도 관찰사·대사헌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