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미상. 함경북도 회령출신. 회령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영화계에 투신할 목적으로 서울로 와 조선키네마에서 촬영기사의 조수로 일하면서 기술을 습득하였다.
그 뒤 나운규(羅雲奎)의 「잘 있거라」와 「두만강을 건너서」를 촬영하였다. 그러나 나운규프로덕션이 해산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에 있는 신흥(新興)키네마에서 기술연구에 힘썼다.
1년 후에 귀국하여 유지영(柳志永)의 외화배급소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외화배급업무에 종사하였다. 1931년에는 카프파(KAPF派)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영화동호인회의 일원으로 있었다.
1937년에는 이기세(李基世)가 주재하던 기신양행(紀新洋行)에서 본격적으로 제작과 배급업무를 익혔다. 종로에서 큰 점포를 경영하는 오덕섭(吳德燮)을 만나 그의 출자로 영화배급소이자 제작소인 고려영화협회를 창립하였다.
1940년 일제의 강압적인 영화정책에 못이겨 조선영화인협회의 평의원으로, 또 제작회사통합추진위원으로 일하였다. 그가 촬영한 주요영화는 1926년나운규의 작품을 비롯하여, 「들쥐」(1927)·「잘 있거라」(1927)·「사랑을 찾아서」(1928)·「옥녀(玉女)」(1928)·「약혼」(1929)·「금강한(金剛恨)」(1930)·「철인도(鐵人都)」(1930) 등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영화제작은 물론 내외배급과 외국영화의 수입에 이르기까지 영화사업 전반에 걸친 흥행관계를 처음으로 궤도에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