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성균관전적, 홍문관교리, 임천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태(而泰)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1년(선조 4)
사망 연도
1607년(선조 40)
본관
광주(廣州)
주요 관직
성균관전적|홍문관교리|임천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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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성균관전적, 홍문관교리, 임천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태(而泰). 이준경(李浚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열(李禮悅)이고, 아버지는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이사수(李士修)이고, 어머니는 김선(金銑)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참찬 이필영(李必榮)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1596년(선조 29) 주서(注書)를 거쳐, 정언에 올랐다가 이듬해 헌납에 제수되었으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남쪽에 파견되면서 헌납을 사직하였다.

1598년 지평·직강·헌납을 차례로 역임하던 중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제학·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수권(首圈: 가장 우수한 후보자로 지정됨.)으로 선발되었다.

이어 이조좌랑 겸 왕세자를 보필하는 사서(司書)직을 수행하다가, 이듬해 성균관전적·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소북(小北)을 이끄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의 당을 좇다 헌부의 탄핵을 받아 한 때 삭탈관작되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607년(선조 40) 교서관교리에 재임용되었다.

이어 임천군수(林川郡守)로 파견되어 목민 업무를 수행하다가 37세의 일기로 졸하였다. 시론(時論)에 합하지 않은 김류(金瑬) 등을 탄핵하여 여러 해 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젊어서 관직에 등용되어 시세(時勢)에 편승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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