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태(而泰). 이준경(李浚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열(李禮悅)이고, 아버지는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낸 이사수(李士修)이고, 어머니는 김선(金銑)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正公) 참찬 이필영(李必榮)의 형이다.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고, 1596년(선조 29) 주서(注書)를 거쳐, 정언에 올랐다가 이듬해 헌납에 제수되었으나,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남쪽에 파견되면서 헌납을 사직하였다.
1598년 지평·직강·헌납을 차례로 역임하던 중 홍문록(弘文錄: 홍문관 제학·교리 등을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수권(首圈: 가장 우수한 후보자로 지정됨.)으로 선발되었다.
이어 이조좌랑 겸 왕세자를 보필하는 사서(司書)직을 수행하다가, 이듬해 성균관전적·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소북(小北)을 이끄는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의 당을 좇다 헌부의 탄핵을 받아 한 때 삭탈관작되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607년(선조 40) 교서관교리에 재임용되었다.
이어 임천군수(林川郡守)로 파견되어 목민 업무를 수행하다가 37세의 일기로 졸하였다. 시론(時論)에 합하지 않은 김류(金瑬) 등을 탄핵하여 여러 해 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젊어서 관직에 등용되어 시세(時勢)에 편승했다는 비난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