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함(子涵). 증 이조참판 이정룡(李廷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이집(李潗)이고, 아버지는 이병건(李秉健)이며, 어머니는 홍우해(洪禹諧)의 딸이다.
1750년(영조 2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755년 설서(說書)가 되었으며, 다음해 강화부유수 조영국(趙榮國)의 허실을 조사하기 위하여 특별히 강도어사(江都御史)에 임명되었다.
1762년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좌익선(左翊善)을 지낸 뒤 형조참의로 있을 때, 나경언(羅景彦)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허물 10여조를 낱낱이 들어 형조에 보고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즉시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여 이를 알렸다.
1764년 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대사간·대사성, 이조참의, 승지, 예조참판을 두루 역임하였다. 1772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는 여러차례 영의정을 지낸 김치인(金致仁)이 붕당(朋黨)을 조성하고 사사로움을 이루었다고 상소하여 그를 유배시켰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대사헌의 몸으로서 역적들의 토죄(討罪)를 늦게 처리하였다는 이유로 단천부(端川府)로 유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