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城州). 자는 욱재(郁哉). 이공집(李公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응(李慶應)이고, 아버지는 이광연(李光埏)이며, 어머니는 윤종형(尹宗亨)의 딸이다. 직장 이광곤(李光坤)에게 입양되었다.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가주서(假注書)로 근무하다 조보(朝報: 승정원에서 매일 처리한 일을 반포하는 관청의 소식지)를 졸필로 어지럽게 썼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1601년(선조 34)부터 감찰, 병조좌랑·경기도사·예조좌랑·정랑 등을 거쳐 1604년(선조 37)에는 평안도평사로 파견되었으나 인물이 합당하지 않다는 헌부의 탄핵으로 교체되었다. 이듬해 충청좌도 시관(試官)으로 파견되었다가 정언·성균관전적·병조정랑 겸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06년(선조 39) 천추사(千秋使) 홍경신(洪慶臣)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 왔다. 선조가 죽자 병조정랑으로『선조실록』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또 산릉도감 감역관(監役官)의 공으로 상현궁(上弦弓) 1정이 하사되었다.
1610년(광해 2) 지평에 제수되었다. 1621년 명청교체기의 위기 속에서 모문룡(毛文龍)의 접반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여진의 습격을 받아 도망했다는 이유로 국문을 당하였다. 인조가 즉위한 뒤 장령(掌令)·필선·집의 등의 관직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