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2월 4일 경기도 개성에서 이암석의 아들로 출생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18세 때부터 장사에 나서 개성과 해주에서 주2을 운영하였다. 1895년 11월 해주 보부상 김철산과 함께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3]에게 보내는 주8의 밀서를 갖고 의주까지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이후 개성에 정착하여 잡화점을 경영하던 중 친구가 준 전도 책자 『인가귀도』를 읽고 주4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개성 북부교회에서 무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8년 결혼한 박로득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권서(勸書)주5가 되어 개성과 연안, 배천, 금천 지역에서 전도하였고 1904년 개성에서 사립 주1를 설립하였다. 1904년 9월 서울 청녕교회(광희문교회의 전신)와 강원도 이천읍교회, 개성 남부교회 권사로 사역하다가 1908년 9월 남감리회 주9에서 주7 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권서 이응현, 한주익과 함께 주6으로 가서 중국인 교인 싼진[單金]과 그 지역 민족운동가 박무림의 도움을 받아 용정 시내에 교회를 개척하고 주변 한인촌을 돌며 전도한 결과 일 년 만에 9개소에 5백여 명의 교인을 얻었다.
그 무렵 원산에 본부를 둔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도 북간도 지역 선교를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어 ‘선교 사역 중첩과 경쟁’을 피하자는 남감리회 선교부 결정에 따라 교회와 교인을 장로교회에 넘기고 일 년 만에 철수하였다.
귀국 후 철원교회를 담임하였고 1911년 12월 서울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1912년 9월 남감리회 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12년 개성 남부교회, 1915년 금천교회, 1918년 경성지방 순행 목사로 활약하였다. 1924년 남감리회 연회에서 북간도 선교를 재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다시 선교사로 파송되어 용정을 중심으로 두도구, 이도구, 옹성나자, 경신향, 국자가, 백초구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1932년 건강 악화로 귀국하여 1933년 4월 연회에서 자원 은퇴를 한 후 금강산과 강릉에서 요양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1956년 7월 23일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