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신곡(薪谷). 임정(任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사 임윤신(任允臣)이고 아버지는 참봉 임전(任錪)이며, 어머니는 윤자신(尹自新)의 딸이다. 이정구(李廷龜)와 신흠(申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생원·진사시에 모두 장원을 하였고,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성균관 재학 중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161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겸열이 되었으며, 검열 재직 중 문한(文翰)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이이첨(李爾瞻)의 추천을 받았다.
그 뒤 대교를 거쳐 1620년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으며, 이어 정언·이조좌랑·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친아들과 다름없을 정도로 심복이었으며, 유생 때부터 폐모를 주장하는 등 흉악함이 극에 달했다는 이유로 언관의 탄핵을 받아 멀리 유배되었다.
1628년(인조 6) 반역을 도모한 유효립(柳孝立)의 옥사에 관련되어 경원(慶源)으로 다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이듬해 후금(後金)과 통하여 역모를 꾀한 양경홍(梁景鴻) 사건에 관련되어 추국을 받은 뒤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으며, 1631년 홍산(鴻山)으로 옮겨졌다가 1633년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