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수초(遂初)이고, 호는 서봉(西峰). 임정(任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응신(任應臣)이고 아버지는 임협(任鋏)이며, 어머니는 장징(張徵)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13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예조좌랑 재직시 홍문록(弘文錄)에 입록되었으며, 그 뒤 정언·수찬을 역임하였다.
1615년 독서당(讀書堂)에 간택되었으며, 지평·납·문학·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19년 필선이 되었으며, 이어 응교를 거쳐 보덕이 되었다. 『선조실록』의 편찬 때는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폐모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언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한 뒤 4대문 밖으로 쫓겨났다가 중도부처(中道付處: 죄를 감하여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원하는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하던 제도)로 가중되어 정산(定山)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먼 곳으로 유배형에 처할 것을 요청한 언관의 주장으로 간성(杆城)으로 옮겨졌다. 그 뒤 몇차례의 사면이 언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1628년 반역을 도모한 유효립(柳孝立) 옥사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추국 중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