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신지(身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8년(영조 24)
사망 연도
1828년(순조 28)
본관
풍천(豊川, 지금의 황해도 송화)
주요 관직
판의금부사|지중추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신지(身之). 형조참의 임순원(任舜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임수관(任守寬)이고, 생부(生父)는 임성(任城)이며, 어머니는 심득행(沈得行)의 딸이다. 임선(任琁)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91년(정조 15) 왕의 수원 환차(還次: 행차가 돌아옴) 때 유생과 무사를 시험보았는데, 유생 중 수석을 차지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는 혜택을 받았으며, 1794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해 부수찬과 교리가 되었다.

이듬해 자전(慈殿)의 회갑연 때 경모궁(景摸宮) 친향대축(親享大祝)을 담당한 상으로 가자(加資)되었으며, 1798년에는 이천부사·승지를 거쳐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804년 예방(禮房)승지로 재직하면서 정순대비(貞純大妃)를 위한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일한 공으로 가자되었다.

1813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에 갔다 왔으며, 이 후 여러 차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819년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1822년가순궁(嘉順宮)이 졸하자 원소제조(園所提調)가 되었으며, 곧 이어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로서 활동하였다. 1823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그 뒤 한성부판윤·공조판서·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828년 지중추부사로 재직 중 죽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