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형지(亨之). 임복(任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판관 임팽손(任彭孫)이고, 아버지는 훈련원부정 임유(任瀏)이며, 어머니는 이비(李貔)의 딸이다.
1525년(중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4년 헌납이 되었으며, 헌납 재직 중 원망의 말을 처사촌인 윤충원(尹忠元)에게 듣고 동료에게 발설한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하여 윤충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관직이 교체되면서 혐의를 추문당했다.
그러나 1537년 명의 사신이 오자 문예관(問禮官)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뒤 장령을 거쳐 김안로(金安老) 패사 사건 발생 직후 사간에 제수되어 허항(許沆)·채무택(菜無擇) 등을 논죄할 때 참여하였다는 것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543년 광주목사를 거쳐 제주목사로 제수되었으나, 여론이 좋지 않은 자를 당상관으로 승진시킬 수 없다는 언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 뒤 1547년 여주목사가 되었으나 청탁에 의해 죄인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을 지체하였다는 까닭으로 관직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곧 다시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그 뒤 경주부윤과 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