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정(子正)이고 호는 당호(棠湖). 임명필(任明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윤 임열(任說)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정 임영로(任榮老)이다. 어머니는 청릉부원군 심강(沈鋼)의 딸이다. 임장(任章)의 형으로, 정인홍(鄭仁弘)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60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승정원주서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정언·병조좌랑·예조좌랑·시강원사서·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의 재위 당시에는 동생 장과 함께 소북(小北) 중 남당(南党)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1608년 광해군 즉위 이후 헌납이 되었으며, 헌납 재직 중 선조의 인사 행정의 잘못을 비판한 소를 올린 정경세(鄭経世)를 공격하면서 피혐(避嫌)하여 정경세와 같은 입장을 지낸 홍가신(洪可臣)과 갈등을 빚었으나, 왕의 명으로 다시 출사(出仕)하였다. 이어 성균관직강을 거친 뒤, 1610년 함경도 안무어사(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그 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이 옥사가 일어났을 때 공이 많았다는 것으로 녹훈되었다.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재편찬했을 때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형제간에 소속 당파가 달라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출사하여 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613년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 혐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에 관련된 박치의(朴致毅)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주장한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을 귀양보내라는 정온(鄭蘊)이 상소에 관련되어 의금부의 신문을 받았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 논의 때 폐출을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이듬해 명의 원병 요청에 대한 논의 때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등 광해군의 입장을 옹호하는 처세를 보였다. 이러한 연유로 언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제수받기도 했으나, 1619년 병사하였다.
이후 후금과 영합하여 화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관작을 추탈당했다. 그 뒤 1664년(현종 5) 아들 경상감사 임의백(任義伯)의 상소로 직첩(職牒: 관직 임명사령장) 을 환급받았다. 풍안군(豊安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