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룡(子龍). 임명필(任明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윤 임열(任說)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정 임영로(任榮老)이며, 어머니는 청릉부원군 심강(沈鋼)의 딸이다. 임연(任兗)의 동생이다.
159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가 되었다. 그 뒤 승정원주서·예문관대교를 거쳐 형조좌랑·정언을 지냈다. 선조의 재위 당시에는 형 임연과 함께 소북(小北) 중 남당(南黨)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광해군의 즉위 직후 정언으로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의 즉위에 비판적인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였다. 그 뒤 부수찬·지평·수찬 등을 역임한 뒤, 1610년 헌납이 되었고,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 등 요직에 임명되었다.
『선조실록』의 편찬 때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색이 다른 형제간의 알력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다시 출사하였다. 1613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한 혐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 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에는 폐모살제(廢母殺弟: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임)를 주장한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을 귀양보내라는 정온(鄭蘊)의 상소에 관련되어 의금부의 추국을 받았다.
그 뒤 1618년에 나주목사로 이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소(任所)에서 졸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임해군의 치죄를 주장하였다는 것으로 파직, 불서용의 처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