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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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유적
조선시대 공신들의 초상을 봉안하거나 관곽을 보관하였던 관서.
이칭
이칭
사훈각(思勳閣)
유적/건물
건축 양식
관서
건립 시기
1395년(태조 4)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용 요약

장생전(長生殿)은 조선시대 공신들의 초상을 봉안하거나 관곽을 보관하였던 관서이다. 태조 대에는 태조의 어진과 공신의 초상을 함께 봉안하다가 태종 대에 공신의 초상만 봉안하였다. 세종 대부터 관곽 보관의 관서로서 성격이 변화하였다. 관곽 제공의 대상은 인조 이전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대군으로 한정되었다가 이후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기존 귀후서의 기능을 흡수하게 되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공신들의 초상을 봉안하거나 관곽을 보관하였던 관서.
건립경위

장생전(長生殿)은 조선 건국 초 주1들의 초상을 봉안한 전각이었다가 세종 이후 주2을 제작하고 보관하였던 관서로 업무와 성격이 변화하였다. 장생전은 1395년(태조 4) 공신들의 주3을 두기 위해 주4 서쪽 장의동(藏義洞)에 영건되었다.

장생전은 중국의 당 · 송의 제도를 참고한 것이었다. 당나라에서는 주5에 공신들의 주6를 보관하는 제도가 있으며, 송나라에서는 경령궁(景靈宮)에 군주의 어용과 훈신 · 공신을 그려 함께 봉안하였다. 태조 대에는 경령궁 제도와 유사하게 태조의 주7과 공신들의 도상을 함께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411년(태종 11) 장생전을 사훈각(思勳閣)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태조의 어진과 공신들의 초상이 함께 봉안되어 있어서 ‘전(殿)’이라 하였지만, 이에 대한 수정을 의미한다. 곧 공신들의 초상을 안치하면서 건물의 격을 ‘각(閣)'으로 변경하여 사훈각으로 하였던 것이었다. 이는 1418년(태종 18) 사훈각에 공신들의 영정을 봉안하겠다는 태종의 하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장생전은 이후 전각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장생전은 세종 이후 그 기능이 변화하였다. 1444년(세종 26) 장생전에 관곽 기물인 주8를 제작하고 보관하도록 하면서 장생전을 기존 터에 다시 짓도록 하였다. 기존 상례 시 관곽을 담당하였던 기관으로 귀후서(歸厚署)가 있었다. 장생전과 업무가 겹치기는 하지만 관곽을 제공하는 대상에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장생전은 국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대군 등 왕실 가족들의 주9에 관곽을 제공하였다.

왕실 가족이라도 후궁이나 왕자 등은 관료 이하와 같이 귀후서에서 관곽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인조 대 이후 장생전에서 관곽을 제공하는 대상이 확대되어 기존에 귀후서에서 관곽을 제공하였던 왕실 가족뿐만 아니라 왕실 구성원의 가족, 그리고 영의정이나 영중추부사와 같은 원로 대신의 장례에서 장생전에서 관곽재를 공급하였다. 이는 결국 장생전이 귀후서의 업무를 흡수한 것이 된 것이었고, 1777년(정조 1) 귀후서는 혁파되었고 장생전은 법제화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대전회통(大典會通)』
『세종실록(世宗實錄)』
『춘관통고(春官通考)』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단행본

이현진, 「조선시대 장생전(長生殿)의 설치와 운영」(『진단학보』 131, 2018)
주석
주1

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    우리말샘

주2

시체를 넣는 속 널과 겉 널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3

종교나 신화적 주제를 표현한 미술 작품에 나타난 인물 또는 형상.    우리말샘

주4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전. 조선 태조 4년(1395)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고종 2년(1865)에서 고종 5년(1868) 사이에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우리나라 사적이다.    우리말샘

주5

중국 당나라 때에, 개국 공신 24명의 초상을 그려 걸었던 누각.    우리말샘

주6

도안과 그림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임금의 화상(畫像)이나 사진.    우리말샘

주8

살아 있을 때 미리 만들어 두는 관(棺).    우리말샘

주9

오례의 하나. 국장(國葬)을 포함하는 상례를 이른다.    우리말샘

집필자
임혜련(충남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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