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 박승필연예부(朴承弼演藝部)가 제작하였다. 1928년 9월에 개봉하였고, 촬영은 이필우(李弼雨), 주연은 김옥희(金玉姬)·김설자(金雪子)가 맡았다.
일본인들의 자본과 기술에서 독립해 우리 영화사상 처음으로 우리의 민족자본과 기술로 제작된 영화이며 흥행을 하는 극장 단성사(團成社)가 직접 영화제작을 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이필우가 촬영기사로 인정을 받게 된 것도 이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단성사가 영화제작에 손을 댄 것은 그 목적이 프로그램 쟁탈이라는 이해관계에도 있었으나, 그 목적을 따지기 이전에 그로 인해 우리 영화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점이다. 어쨌든 「장화홍련전」은 우리에게 영화제작과 흥행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의 투기에 의해서 초창기 우리 영화사(映畫史)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쉽게 하는 계기로 기억된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1936년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에서 발성영화로 제작되어 그 해 1월 조선극장(朝鮮劇場)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에 이명우(李明雨), 주연은 문수일(文秀一)·문예봉(文藝峰)이 맡았다. 이 영화는 경성촬영소가 「춘향전」(발성영화)의 재제작에서 흥행적으로 성공한 여파였다. 1938년 영화제의 발성부문에서 10대작품 중의 한 작품으로 뽑혔다. 1956년에도 같은 제목의 작품이 정창화(鄭昌和) 감독에 의하여 만들어진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