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안주 출신. 시인 전봉건(全鳳健)의 친형이다.
일본 도쿄부립[東京府立] 제4중학교를 거쳐 1944년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수학하다가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소년시절 철봉을 하다가 척추를 다친 것이 원인이 되어 평생 건강이 부실하였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문학을 전공하여 그 계통의 작품을 상당수 번역하였으며, 특히 발레리(Valery, P. A.)를 좋아하였으나 그 원고는 6·25중에 산일되었다. 창작시는 10여편을 썼을 뿐인데, 그 중 「전선(戰線) 스냅」 한 편만이 동생에 의하여 보관되고 있다.
그러나 시적 재능은 한국전쟁 전에 이미 문단 일각의 인정을 받고 있었으므로, 1950년 봉건이 『문예(文藝)』지에 시 「원(願)」을 처음으로 추천받았을 때 편집자가 그의 작품일 것이라고 짐작하여 그의 이름으로 발표한 일이 있다. 고전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어 음악감상을 즐겼다.
한국전쟁 때 피난지 부산의 어느 다방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 그때 그가 남긴 짤막한 유서는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라고 적고 있다. 이 유서와 함께 그의 자살은 당시 피난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