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간, 병조참판,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백익(伯益)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7년(숙종 13)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임천(林川)
주요 관직
병조참판|지의금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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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간, 병조참판,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익(伯益). 마전군수 조시형(趙時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천부사 조현기(趙顯期)이고, 아버지는 좌랑 조정강(趙正綱)이며, 어머니는 서한주(徐漢柱)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1년(영조 7) 정언으로 서용된 뒤 곧 지평으로 옮겼으나 홍문관의 차자로 파직되었고, 1733년 교리로 재직 중에는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을 향사(享祀)하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의 지원에 힘썼다.

이 후 부교리·정언·부교리·부수찬·정언·부수찬을 차례로 역임한 뒤, 1736년에는 수찬으로 재직하다 홍문록(弘文錄)을 미루었다는 이유로 파면 위기에 처했으나 부제학(副提學) 서종옥(徐宗玉)의 도움으로 모면했고, 이어 이조좌랑으로 제수되었다.

이듬해부터 헌납·겸문학·헌납·부응교·집의·응교·승지 등을 거쳐 1739년(영조 15)에는 경상도관찰사로 제수되었으나 전랑으로 임명될 당시 사사로운 청탁을 문제삼은 장령 정언유(鄭彦儒)의 탄핵으로 사직소를 올려 사양했다. 이듬해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곧 외직인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이어 1742년부터 강원도관찰사로 근무하였으나, 1744년(영조 20) 지평 박성원(朴聖源)의 탄핵 등으로 순탄하지 못했다. 1745년에서 1746년 사이에 대사간을 역임했고, 1748년에는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752년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을 거쳐, 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을 지낸 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올랐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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