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여(子餘). 장령 조속(趙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인화가 조지운(趙之耘)이고, 아버지는 조형보(趙衡輔)이며, 어머니는 임일유(林一儒)의 딸이다.
1707년(숙종 33) 진사(進士)의 신분으로 구일절제(九日節製)에서 뽑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갔다. 그 뒤 1719년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재직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처(妻)를 구박해 죽게 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삭거사판(削去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됨)되었다.
그 뒤 경종이 즉위한 뒤 정언에 제수되어 진휼곡 탕감에 노력을 기울였고, 이미 제거된 노론 대신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의 잔재 제거 및 국가정책에 의해 훼철된 윤증(尹拯)을 제향한 서원의 재건에 앞장섰다.
1724년(경종 4) 지평을 거쳐, 정언으로 재직 중 경종이 죽자 약을 잘못 쓴 어의(御醫)와 이공윤(李公胤)을 탄핵하였고, 1727년(영조 3) 사간(司諫)으로 재직시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한 정호(鄭澔) 등을 극형으로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세자를 보필하는 필선(弼善)·보덕(輔德)을 거쳐 이듬해에는 집의(執義)로 제수되었다가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파견되었으며, 이어 사간으로 승진되었다. 그 뒤 1729년 도당록(都堂錄)에 선발되었고, 수찬(修撰)을 거쳐 1731년 승지(承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