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량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 세종~단종 대 형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낸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53년(단종 1)
본관
양주(楊州)
주요 관직
평안도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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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수량은 조선 전기 세종~단종 대 형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낸 문신이다. 세종 대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436년 함길도 지역에 발생한 기근과 역질 문제 때문에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지역의 실상을 파악하였다. 관찰사 직과 형조참판을 거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계유정난 때 김종서·황보인 등과 같은 당파로 몰렸던 형 조수량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결국, 안평대군과의 관계가 문제되어 처형되었다.

정의
조선 전기 세종~단종 대 형조참판, 사헌부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낸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조수량(趙遂良)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보승(保勝) 별장(別將)을 지냈던 조인필(趙仁弼), 할아버지는 서운관(書雲觀) 정(正)을 지냈던 조의(趙誼)이다. 아버지는 태종 대와 세종 대에 걸쳐 조정에서 많은 활동을 한 조계생(趙啓生)이다. 아버지 조계생은 태종의 최측근으로 세종 대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조말생(趙末生)의 동생이다. 형은 조극관(趙克寬)이다. 부인은 이적(李迹)의 딸이다.

주요 활동

출생 시기는 현재의 기록으로 확인이 어렵다. 1420년(세종 2) 식년시 문과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24년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으로 임명된 기록부터 그의 관력이 확인된다. 이후 예조 좌랑, 사헌부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판군자(判軍資) 감사(監事) 등을 거쳤다.

1436년 함길도(咸吉道)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飢饉) 이후 역질이 돌아 사람이 많이 죽게 되자 함길도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해당 지역 실상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정에 복귀한 후 사간원(司諫院) 우사간(右司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강원도관찰사, 형조 참의, 예조 참의, 황해도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충청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형 조극관이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과 같은 당파로 몰려 처형되었고, 조수량 역시 관련자로 몰려 고성(固城)에 안치되었다. 결국 안평대군(安平大君)과의 관계 등으로 처형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방목(國朝榜目)』
『단종실록(端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논문

한춘순, 「단종 대 癸酉靖難과 그 성격」(『한국사연구』 174, 한국사연구회, 2016)
지두환, 「세조 집권 과정에서의 내종친의 정치성향」(『백산학보』 99, 백산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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