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시기는 현재의 기록으로 확인이 어렵다. 1420년(세종 2) 식년시 문과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24년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으로 임명된 기록부터 그의 관력이 확인된다. 이후 예조 좌랑, 사헌부 장령(掌令)과 집의(執義), 판군자(判軍資) 감사(監事) 등을 거쳤다.
1436년 함길도(咸吉道)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飢饉) 이후 역질이 돌아 사람이 많이 죽게 되자 함길도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해당 지역 실상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정에 복귀한 후 사간원(司諫院) 우사간(右司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강원도관찰사, 형조 참의, 예조 참의, 황해도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충청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형 조극관이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과 같은 당파로 몰려 처형되었고, 조수량 역시 관련자로 몰려 고성(固城)에 안치되었다. 결국 안평대군(安平大君)과의 관계 등으로 처형되어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