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복 ()

조영복 초상 유복본
조영복 초상 유복본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도승지, 개성유수,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석오(錫五)
이지당(二知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72년(현종 13)
사망 연도
1728년(영조 4)
본관
함안(咸安)
주요 관직
도승지|한성부우윤
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개성유수,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석오(錫五), 호는 이지당(二知堂). 조일(趙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봉원(趙逢源)이고, 아버지는 군수 조해(趙楷)이며, 어머니는 강유(姜游)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05년(숙종 31) 사마시에 합격,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을 지내고 1712년 김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714년 예천군수로 있으면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15년 지평이 되어 예천군의 주원(厨院) 수세(收稅)를 감하여줄 것을 청하였으며, 다음 해 장령으로서 조성복(趙聖復)과 소론의 영수 윤선거(尹宣擧)의 선정(先正) 칭호를 금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 정언·헌납을 지냈다.

1717년 전라우도어사로 임명되고, 이듬해 동래부사를 거쳐 1719년 승지가 되었고, 그 해에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충청감사를 지내고 승지가 되었으나 신임사화 때 소론에 배척당하여 파직되고, 선산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영춘(永春)에 이배되었다.

1725년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 공조참의·참찬관·승지·경상도감사·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727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네 번이나 소를 올려 전일의 죄인들을 이제 등용시켜서는 아니 되며 그들과 함께 정치를 할 수 없다고 극언하다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한성부우윤이 되었다가 난이 평정된 뒤 사직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나 필원(筆苑)에 이름이 끼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지수재집(知守齋集)』
『전고대방(典故大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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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오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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