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석오(錫五), 호는 이지당(二知堂). 조일(趙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봉원(趙逢源)이고, 아버지는 군수 조해(趙楷)이며, 어머니는 강유(姜游)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1705년(숙종 31) 사마시에 합격,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을 지내고 1712년 김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714년 예천군수로 있으면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15년 지평이 되어 예천군의 주원(厨院) 수세(收稅)를 감하여줄 것을 청하였으며, 다음 해 장령으로서 조성복(趙聖復)과 소론의 영수 윤선거(尹宣擧)의 선정(先正) 칭호를 금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 정언·헌납을 지냈다.
1717년 전라우도어사로 임명되고, 이듬해 동래부사를 거쳐 1719년 승지가 되었고, 그 해에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충청감사를 지내고 승지가 되었으나 신임사화 때 소론에 배척당하여 파직되고, 선산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영춘(永春)에 이배되었다.
1725년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 공조참의·참찬관·승지·경상도감사·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727년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네 번이나 소를 올려 전일의 죄인들을 이제 등용시켜서는 아니 되며 그들과 함께 정치를 할 수 없다고 극언하다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한성부우윤이 되었다가 난이 평정된 뒤 사직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나 필원(筆苑)에 이름이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