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경(致卿). 조형(趙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상변(趙相抃)이고, 아버지는 직장 조기수(趙祺壽)이다. 어머니는 종실(宗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의 딸이다.
1702년(숙종 28) 사마시를 거쳐 1710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용강현령(龍岡縣令)을 거쳐 정언에 올라 그 해 일어난 과옥(科獄)의 재심(再審)을 강력하게 청하다 삭탈관직되었다. 그러나 곧 간관에 복직되었으며, 이어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 기록)에 선발되었으나 격식에 어긋났다 하여 삭제되었다.
1720년 경종 즉위 후, 지평·부수찬·헌납·교리·사인·부응교·집의·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나가지 않았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부응교를 지내고 다음 해 동부승지·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노론의 집권으로 파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집권하자 이조참의·부제학·승지·대사성을 역임하고, 1728년 개성유수 때 왕씨 능침(陵寢)의 수호를 명받았다.
이후 대흥산성(大興山城) 수비의 소를 올려 시행하게 했다. 기근이 들자 녹봉을 기민 진구(賑救)에 내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어 공조참의가 되어서는 양역법(良役法)의 개정과 균역법(均役法)의 실시에 힘썼다. 그 뒤 대사헌·부제학 등을 두루 지낸 뒤 1733년 함경도관찰사로 전임되자 전삼(田蔘)의 폐해를 고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승지·이조참판·예조참판을 지내고 평안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이도확립(吏道確立)과 재정의 충실을 기하였다. 또 함흥의 10리나 되는 만세교(萬歲橋)의 보수를 위해 기본자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740년 이후 공조참판·부총관·동지경연사의 벼슬을 거쳐 병으로 사임하였다.
1744년 나이 70에 자헌대부에 가자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한성부판윤·동지성균관사·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749년 정헌대부로 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평생 50년을 조정에 봉직했으나 사사로움이 없었다. 평양감사를 지냈으면서도 돌아오는 행장은 타고 나선 말 한 필 뿐이었다고 한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