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사는 중국 악부 죽지사를 모방하여 우리나라의 경치, 인정, 풍속 따위를 노래한 가사(歌詞)이다. 죽지사는 악부시의 일종이다. 순임금이 죽자 상수에 몸을 던진 아황과 여영을 기리는 처량한 노래가 동정호 일대에 생겨났다. 민가의 이 노래를 죽지라고 명명하였다. 이것을 당나라 유우석이 가창을 전제한 죽지사라는 작품 양식으로 재정비하였다. 후대의 문인들이 자기의 시대와 지역에 알맞게 새로운 죽지사를 창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 이제현이 유우석의 「죽지사」를 근거로 「소악부」를 지었다. 조선 후기에 소외된 지식인과 위항시인들이 죽지사 작품을 다수 창작하였다.
민가의 제목을 죽지라고 명명한 것은 대나무와 관련된 사정이 있다. 순(舜)임금이 남방을 순수하다가 창오야(蒼梧野)에서 세상을 떠나자 두 부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대나무에 피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하다가 마침내 상수(湘水)에 빠져 죽었다.
이 후 지역민들은 두 여인을 상수의 신(神)으로 받들어 상군(湘君) 혹은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일컫고, 이 지역에서 나는 대나무에 그들의 피눈물 흔적을 상징하는 무늬가 있다고 하여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동정호 일대에 처량하고 원망 어린 노래가 생겨났다.
이 노래가 상부인의 사정을 기념하는 것이라 하여 죽지라고 명명했다. 이후 죽지는 파유지역 일대에 널리 전파되어 이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민가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죽지라는 민가를 죽지사라는 작품양식으로 재정비하여 문단에 부각시킨 사람은 당나라 때 유우석(劉禹錫)이다.
그는 기주자사(夔州刺使)로 좌천되어 있을 때에 건평(建平)지역 아녀(兒女)들이 돌아가며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이것을 채집하여 죽지사라는 새로운 노래가사를 지었다. 이 죽지사는 작자의 순수 서정이 아니라 건평이란 특정 지역의 민가와 민풍(民風)을 근거로 지어졌다.
읊조리는 시가 아니라 가창(歌唱)을 전제한 노랫말로 지어졌다. 개별작품의 양식은 7언절구이면서 전체가 9수의 연작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등 대단히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었다. 후대의 많은 문인들이 유우석의 「죽지사」의 특징을 의미 있게 주목하고 자기의 시대와 지역에 알맞게 응용하여 새로운 죽지사를 창작하였다. 마침내 죽지사는 문인들이 즐겨 짓는 문학작품의 하나로 문단에 정착하게 되었다.
죽지사는 전통적으로 악부시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왔다. 곽무천(郭茂倩)은 『악부시집(樂府詩集)』 근대곡사(近代曲詞)에 죽지사를 수록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은 유우석의 「죽지사」를 모델로 「소악부(小樂府)」를 지었으며, 신광수(申光洙)의 「관서악부(關西樂府)」가 관서죽지사(關西竹枝詞)로 명명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죽지사에 엄격한 양식적 제약이 없다. 7언절구 연작 형태가 보통이다. 그러나 장편 혹은 단시 형태로 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단순히 특정 지역의 토속쇄사(土俗瑣事)를 읊은 작품까지 관습적으로 죽지사라고 하기도 하였다. 죽지사는 양식적인 제약이 느슨하고 개념 적용의 폭이 넓었다.
우리나라의 죽지사는 고려 말부터 부분적으로 실험되었다. 이제현이 유우석의 「죽지사」를 근거로 「소악부」를 지었다. 성현(成俔)이 「죽지사」 10수를 지어 『허백당풍아록(虛白堂風雅錄)』에 수록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의 작품 속에서도 이런 종류의 작품이 간헐적으로 발견된다.
조선 후기에 와서 주로 소외된 지식인과 위항시인들이 죽지사 작품을 다수 창작함으로써 문학사의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부각되었다. 서얼 출신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에 보고 들은 풍물을 회고하여 「일동죽지사(日東竹枝詞)」 34수를 지었다. 역관 출신인 조수삼(趙秀三)은 『방여승략(方輿勝略)』을 보고 82개국의 풍물을 작품화하여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133수를 지었다.
김해에서 24년 간의 유배생활을 한 이학규(李學逵)는 김해의 풍물과 토속을 읊은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 30수를 지었다. 개화파의 인물인 이유원(李裕元)은 청나라 때의 『직공도(職貢圖)』를 보고 30개국의 풍물을 작품화하여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30수를 지었다. 한말의 서리 출신인 최영년(崔永年)은 사화(史話)와 민간 풍물(風物)을 다양하게 작품화하여 560수에 달하는 장편의 「해동죽지사(海東竹枝詞)」를 지었다.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죽지사는 중세적 보편주의 동요와 새로운 작품양식의 모색이란 조선 후기 문단의 커다란 변화의 흐름에 부응한 것이다. 한시의 소재를 민간의 토속쇄사에까지 확대시켜서 조선시 조선풍의 실현에 일정하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