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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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가사 / 지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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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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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의 교훈을 전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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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의 교훈을 전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사.
내용

천주교가사·천주교성가·천주찬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형식은 조선 후기의 일반가사형식인 4·4조로 되어 있으며, 후기에 와서는 드물게 7·5조와 8·5조도 나타난다.

평이한 한글로 작사되고, 가사가 주로 장형(長型)으로 되어 있음은, 작사의 본래 의도가 종교의식의 음악적 목적에 사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대중교화를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전승자들은 이를 ‘천당노래’·‘천당강론’·‘사주구령가(事主救靈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천당노래’란 하늘 나라를 향하여 영생을 꿈꾸며 사는 순례자들이 자기네 고향인 천당길을 닦는 노래라는 뜻이며, ‘강론’이라는 명칭은 가사의 내용이 교훈과 교화를 주로 하고 있으므로 붙인 것이다.

또한 ‘사대구령가’란 천주를 섬기고 자기 영혼의 길을 가르치는 신앙 본래의 목적을 노래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천주가사를 곡조에 맞추어 노래한 것은 1900년대부터이다.

가사의 사용자들이 자신의 감흥을 위하여 그 시대에 널리 유행되고 있는 노래의 곡조를 빌려다 쓰거나 단조로운 곡조를 붙여서 불렀고, 전례의식의 성가로 사용된 것은 1920년경부터이며 한 가사의 일부분이 인용되는 정도였다.

천주가사는 작가의 단순한 창작의욕에서 발생된 문학작품이 아니라, 대중포교와 신도들의 교화를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작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 중에 교회가 당면한 신앙서 보급의 부족과 신앙교육의 난관을 극복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가사의 전승자가 대부분 부녀층인 것은 천주가사가 무식한 아녀자층의 교육을 해결하려는 방책의 하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가사의 구성이 훈계·호소·권면조에다가 형식이 국문 되풀림식이거나 숫자풀림식 또는 민요의 베틀가식 등 다양한 것은 대중의 흥미에 밀착시켜 암기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천주가사의 가명(歌名)은 그대로 교리가 된다. 생소한 교리나 문학적인 소재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교리와 윤리적인 내용으로만 구성된다.

신앙의 합리성을 변백(辨白)하는 변신론적 호교론(辨神論的護敎論)과 자연도덕적 윤리생활의 초보적인 교리, 성사생활(聖事生活)의 교육, 천주교교리의 영성적(靈性的)인 의미, 실천윤리의 덕행과 수계생활(守誡生活), 개인 영성이 심화된 영혼의 고백, 행사용 축가와 찬가, 고담(古談)의 우화를 교훈화한 가사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천주가사는 교화와 포교활동의 소산이므로 자연 교회의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 천주가사의 효시를 1779년(정조 3)에 작사된 이벽(李檗)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정약전(丁若銓) 등의 「십계명가(十誡命歌)」로 보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도 있으나, 이 두 작품이 수록된 이승훈(李承薰)의 문집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서지학상으로 재검토를 요하는 것이므로 단정하기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때문에 천주가사의 확실한 형성연대는 1850∼1860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작품이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최양업의 이름이 밝혀진 가첩(歌帖)은 1897년에 필사된 김약슬본(金約瑟本)과 1913년에 복사된 박동헌본(朴東憲本)이 있다. 오늘날까지 밝혀진 천주가사는 약 200종에 이르고 있어, 이를 발전양상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눌 수 있다.

① 제1기(1850년대):이 시기는 천주교교리 발전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시기로, 많은 신심서(信心書)와 교리서가 편찬되어 대중에게 보급되었고, 성사(聖事) 중심의 신앙생활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던 때이다. 신심서의 간행은 수적으로 부족한 선교사의 역할을 대신 해주었고 신앙생활을 심화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이 시기에 나온 작품들은 주로 최양업을 비롯하여 베르뇌(Berneux,S.F.)주교, 남상교(南相敎)·남종삼(南鍾三) 등 성직자와 양반계급층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 중 최양업의 것이 19편, 베르뇌와 남상교·남종삼의 것이 각 1편씩이고, 작자 미상의 것이 10편이다. 그 중 최양업의 것은 사말(四末)을 준비시키고 성사를 교육하며 수덕생활을 지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사향가」·「경세가」·「천당가」·「지옥」·「십계강론」·「삼세대의」·「성세」·「견진」·「고해」·「성체」·「종부」·「신품」·「칠극」·「제경」·「행선」·「애덕」·「선종가」·「사심판」·「공심판」 등이 그것이다.

베르뇌·남상교·남종삼의 가사는 국문 되풀림조의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작자 미상의 작품은 「피악수선가」·「강신부 노래」·「신덕」·「망덕」·「애덕」·「제성」·「옥중제성」 등이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고, 다른 가사들이 모방하고 인용하는 가사는 「사향가」·「피악수선가」·「삼세대의」 등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사향가」는 신자들에게 내세를 지향하며 박해를 극복하게 하는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노래였다.

가사의 배경이 되는 것은 그 시대의 교리서였다. 양심성찰지침서인 『성찰기략(省察記略)』, 참회 기도서인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성생활지침서인 『신명초행(神命初行)』, 칠성사(七聖事)의 교리해설서인 『성교절요(聖敎切要)』, 사후묵상서인 『사말론』 등이 그것이다.

「사향가」는 『신명초행』에서 영향을 받았고, 「선종가」·「사심판가」·「공심판가」는 『사말론』의 내용을 가사화한 것이다. 즉, 가사의 소재와 가명이 그 시대의 신심성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가사가 문학작품처럼 독창적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교리의 산물이요, 교리 교수였기 때문이다.

② 제2기:신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지하교회의 암흑에서 벗어난 시기로, 이때의 가사의 특징은 개인의 영성에서 심화된 고백록적인 자탄가류(自歎歌類)와 개화를 권면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1기의 가사들이 구전 또는 필사되어오다가 편집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편집된 가사집에 있는 수기(手記)에 의하여 최양업 신부의 작품이 밝혀지게 되었다. 천주가사는 오늘의 문학개념과는 달리 작품의 저자와 연대표기에 무관심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근대에 이르러 『경향잡지』에 발표된 대부분의 가사들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는 작품의 관심이 신자교육에만 치우친데서 오는 현상이었다.

③ 제3기:교회가 안정을 찾은 시기로, 계몽을 위한 교육적 가사와 교회행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작사된 것을 비롯하여, 개인의 감사·찬미·참회·회고 등 가사의 내용이 다양해진다.

천주가사의 최종 연대는 1931년 박제원(朴齊元)의 작품들과 『경향잡지』에 수록된 가사들에 두고 있는데, 이는 저자들이 교회의 수난을 경험한 사람들이고, 가사가 개화기 창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때부터 전례의식에 불리는 성가의 가사로도 사용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천주가사의 형성과정으로 보아, 천주가사는 천주교가 박해 속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교리의 진리와 사상이 훌륭하더라도 그것을 소화할 수 없거나 계속 섭취할 의욕을 복돋아주지 못했다면 신앙의 확신으로까지는 이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천주가사는 신자들에게 평이한 가사의 내용으로 영혼을 깊이 해부하여 거기서 얻는 진실한 생각과 느낌을 언어의 조형을 통하여 전달하였기 때문에 감동력과 호소력으로 신앙심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천주가사는 천주교교리의 토착화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천주가사의 연구」(김진소, 『교회사연구』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가톨릭 초기 성가에 대하여」(김약슬, 『문화비평』2, 1970)
「서학전래후의 천주가사-사향가 기타에 대하여-」(김동욱, 『인문과학』21, 연세대학교,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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