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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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후기, 몽골(원)이 쌍성총관부 등에 설치한 관직.
제도/관직
설치 시기
1258년(고종 45)
폐지 시기
1356년(공민왕 5)
소속
쌍성총관부, 탐라총관부, 동녕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총관은 고려 후기 몽골(원)이 쌍성총관부 등에 설치한 관직이다. 몽골(원)이 행성의 하부 조직인 총관부 등에 설치한 관직이다. 로의 규모에 따라 정3품 또는 종3품이며, 몽골(원)이 고려의 양계 지역을 확보하고 동녕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그 총관부에도 설치되었다. 총관은 이들 총관부의 장관직에 해당한다.

정의
고려 후기, 몽골(원)이 쌍성총관부 등에 설치한 관직.
설치 목적

몽골(원)은 행성(行省) 아래 로(路)를 두고 총관부(摠管府)를 설치하였다. 세조 쿠빌라이 칸 시기인 1283년(충렬왕 9)에 10만호 이상의 상로(上路)에는 정3품, 그 이하의 하로(下路)에는 종3품의 총관(摠管)을 1명 두었다.

몽골(원)은 고려의 양계(兩界) 지역을 확보한 후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화주(和州), 서경(西京), 탐라(耽羅: 현, 제주특별자치도)를 직할령으로 만들고 각각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동녕부(東寧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였는데, 총관은 바로 이들 총관부의 장관으로 두어진 직책이다.

임무와 직능

구체적으로 총관의 설치 시기는 쌍성총관부의 경우 1258년(고종 45), 동녕부는 1270년(원종 11), 탐라총관부는 1275년(충렬왕 1)경에 이루어졌다. 이 3개의 총관부에 설치된 총관은 탐라총관부의 경우 1284년(충렬왕 10), 동녕부는 1290년(충렬왕 16), 쌍성총관부는 1356년(공민왕 5)에 폐지되었다. 그 밖에 심주(瀋州: 요양(瀋陽)) 등지의 지역에도 총관을 두었던 기록이 확인된다.

이 중 존속 시기가 가장 길고 원나라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였던 쌍성총관부의 총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녕부나 탐라총관부는 충렬왕과 고려 대신들의 요청에 의해 원나라가 고려에 환속시키는 형식으로 폐지되었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恭愍王)의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의 일환으로 이 지역을 공격·수복하여 폐지될 때까지 고려를 견제·간섭하는 원나라 직할령으로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단행본

李治安, 『行省制度硏究』 (南開大學出版社, 2000)

논문

방동인, 「쌍성총관부고」 (『관동사학』 1, 관동대학교 사학회, 1982: 『한국의 국경획정연구』, 일조각, 1997)
이정신, 「쌍성총관부의 설립과 그 성격」 (『한국사학보』 18, 고려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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