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영남지역에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고통받았으며, 1922년 일본에 유학하여 1933년 동경의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23년 박열(朴烈) · 박흥곤(朴興坤) · 육홍균(陸洪均) 등과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를 조직하여 『불령선인지』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박열의 일본천황암살계획을 돕고자 상해로 잠입하여 폭탄을 운반하여 왔으며, 대역사건(大逆事件)에 연루되어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29일씩 피검당하기를 3년 동안 하였다. 1932년 김법린(金法麟) 등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였고, 1933년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해에 명성여자학교(明星女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본유학 시절 인도승 달마바라로부터 전하여 받은 불사리(佛舍利) 3과를 범어사에 기증하여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는데, 이는 달마바라가 붓다가야의 대탑을 수리하고 그 탑 중의 불사리 약간을 나누어 받아 세계 여러 나라에 전한 것 중의 일부이다.
1934년 사천에 광명학원(光明學院)을 설립하였고, 1936년 다솔사불교전수강원을 설립하였다. 이 무렵 김법린 · 김범부(金凡父) 등이 다솔사에 머무르며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7년 고려대장경을 인경(印經)하였고, 1943년 9월부터 13개월 동안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상남도경찰국에 구검되었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대표에 피임되었고, 그 해에 해인사 주지가 되었으며, 국민대학(國民大學)을 창설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의 5·10선거 당시 사천 · 삼천포에서 출마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1년 해인중고등학교를 창설, 이듬해에 해인대학(海印大學)을 설립하고 이사장 및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이후 다솔사의 조실(祖室)로 원효교학(元曉敎學) 및 다도(茶道) 연구에 전념하였고,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79년 7월 10일 입적하자 다솔사에 부도(浮屠)를 봉안하였다.
학문적 관심은 원효(元曉) · 의천(義天) · 초의(草衣) · 만해(萬海) 등에 많았다. 『원효성사반야심경복원소(元曉聖師般若心經復元疏)』 · 『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모집 자료』 · 『해인사사간장경누판목록』 · 「해인사와 3·1운동」 등의 논문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 『한국의 다도』 등의 저서가 있다.
198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