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7칸, 측면 4칸의 겹처마팔작지붕건물.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870년(고종 7) 8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해 10월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28칸을 중건하여 관아로 사용하였던 건물이다.
중앙 3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넓은 대청으로 하였으며, 우단 1칸은 대청보다 조금 높여 전후면에 툇마루를 둔 마루방으로, 대청 좌측 2칸은 전후면에 툇마루를 둔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좌단 1칸에는 온돌방 아궁이를 만들기 위하여 하부는 함실로, 상부는 누마루를 만들었다.
구조는 가공된 장대석으로 2단 축조한 기단상에 원형주좌(圓形柱座)를 조출(彫出)한 8각주초석을 원형주로 세워 이익공(二翼工) 계통의 공포(栱包)를 구성하였는데, 앙서[仰舌]형상으로 돌출된 익공의 선단에 연봉(蓮峰)이 장식적으로 조각되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부로는 초각(草刻 : 당초무늬를 새긴 것)을 한 보아지(규모가 작은 집의 들보 구실을 하는 것)가 퇴량(退樑)을 받치고 있다.
또한 창방(昌枋)으로 결구된 주간에는 초각이 없는 화각반(花刻盤)을 각 칸에 1구(具)씩 배치하여 주심도리(柱心道里) 장혀[長舌]를 받치고 있다. 가구(架構)는 전후 평주 사이에 양내고주(兩內高柱)를 세워 대량과 퇴량을 결구하고 있는데 대량 상부에 낮은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를 놓고 종량(宗樑)을 받쳐주고 있다.
종량 상부 중앙 부분에는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설치하여 종도리와 뜬창방의 이중도리와 함께 옥개부분의 하중을 받치도록 되어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7량집으로 ‘淸寧軒’ 3자의 현판이 붙어 있다. 1983년에 해체, 보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