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기성도 ()

평양성도
평양성도
회화
개념
조선시대 평양부 내외의 실제 경관을 담은 그림. 평양도 · 평양성도 · 기성도 · 서경도.
이칭
이칭
평양도(平壤圖), 평양성도(平壤城圖), 기성도(箕城圖), 서경도(西京圖)
정의
조선시대 평양부 내외의 실제 경관을 담은 그림. 평양도 · 평양성도 · 기성도 · 서경도.
개설

평양은 기성(箕城)·낙랑(樂浪)·서경(西京)·서도(西都) 등 다양한 명칭으로 지칭되었다. 그 중 ‘기성’은 평양이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터전이었음을 의미하며 ‘서경’과 함께 평양의 별칭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기자조선에 대한 논의가 증대되면서 평양의 명칭과 각종 시각 자료를 ‘기성도(箕城圖)’로 지칭하는 관습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평양기성도(平壤箕城圖)’는 평양의 자연적·인문적 경관을 재현한 시각 자료를 통칭하는 용어인 셈이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평양에서 가진 행사 장면을 담은 그림이 이미 15세기에 그려졌다. 그러나 명승명소(名勝名所)와 같은 경관 그 자체를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실경 산수화는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나아가 양란의 피해 복구가 마무리되고 대내외 정세가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던 18세기에는 상업과 무역의 성행에 힘입어 평양이 한양 다음가는 도시로 부상하였고 평양기성도에 대한 수요도 동반 상승하였다. 당시 평양은 재화가 풍성하고 풍류가 넘치는 유락(遊樂)의 도시로 이미지화되어 세간에 평양을 동경하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또한 중앙으로 진출하여 명성을 날린 화가를 배출할 정도로 지역 출신 화가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그와 같은 분위기는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의 평양기성도가 제작, 유통되는 데 일조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초기에 평양의 실경이 어떤 방식으로 시각화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자료는 희소하다. 17세기에는 양란의 피해를 극복하고 황폐화된 기반 시설이 복구되면서 전국의 명산대천과 명승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자연적·인문적 풍경을 화폭에 담는 실경 산수화 제작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정(李楨)의 전칭작으로 알려진 「관서명구첩」에 실린 연광정(練光亭) 장면으로 알 수 있듯이, 평양을 포함하는 관서 지역은 사행로에 위치하는 승경이 주목을 끌었다. 대개 초점 경물을 설정하여 구도를 잡고 수묵 선염을 위주로 한 조선 중기의 화법이 적용되었다. 이 시기 제작을 주도한 세력은 문인 관료들이었고, 주로 화원을 비롯한 전문 화가들이 동원되었다.

17세기 말에는 전국 각지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이 정착되었고 18세기에 접어들면 진경 산수화(眞景山水畵)가 중앙 화단의 주요 장르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평양의 경관을 재현하는 작업은 금강산과 관동 명승 등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의 명승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18세기 후반의 기록이나 작품은 보다 구체적이어서 그 즈음 수요가 증가하고 제작이 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실을 비롯해 문인 관료들의 관심이 증대되면서 관서 명승도(關西名勝圖) 유형에 포함된 사례는 물론이고 전경도(全景圖)와 특정 구역을 근접 포착한 명승도(名勝圖) 등이 병풍과 화첩, 족자 등 여러 가지 장황 형식으로 제작되고 감상되었다. 특히 작자 미상의 「관서명구첩」과 「관서십경도」, 평양성의 전경을 조망한 송암미술관 소장 「기성도」 8폭 병풍, 「평양팔영(平壤八詠)」에 연원을 둔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평양팔경도」의 내용과 화풍이 상통하여 18세기 말~19세기 초 다양한 형식이 동시다발적으로 그려졌음이 드러난다.

19세기로 넘어가면서 평양기성도의 수요와 제작은 더욱 늘어났다. 누차 평안도 소재 누정이 차비대령화원 녹취재의 화제로 출제되었는가 하면 병풍 계열의 평양도가 인기리에 양산되었음을 관련 기록과 유전작이 증명해 준다. 이는 관서 명승이 중앙 화단에서도 익숙한 화제로 정착하였음을 보여 주는데, 당시 현지에 파견되었던 군관 화사들의 활약도 한몫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목판본이 유포되는 등 병풍 형식의 기성도가 대대적으로 유행하였고, 때때로 주문자의 관력(官歷)을 현시하는 행렬이나 민속 놀이 장면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국내외 정세의 변동이 심하였지만 실경 산수화를 주문하고 향유하는 서화 취미와 관습은 민간 계층으로 확대되었고 평양기성도 역시 20세기 초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내용

평양기성도 화면은 평양의 자연 경관과 인문 경관으로 채워져 있다. 산·하천·동굴·섬·기암·폭포 등의 천연 경관이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공적 시설물을 비롯하여 고적·누대·사찰 등 역사 경관과 문화 경관이 조합된 형국이다. 제작 목적과 주문자에 따라 화면 내용에 다소간의 차이가 생겨나지만, 일반적으로 평양성 안팎의 넓은 경관을 포괄하는 전경도는 지리적 형세 외에 공적 시설물의 배치 상태를 나타내는 데 비중을 두었다. 그에 비해 특정 명승을 클로즈업한 평양명승도는 일찍이 조위(曺偉)와 성현(成俔)이 「평양팔영」에서 읊은 을밀대(乙密臺)·부벽루(浮碧樓)·영명사(永明寺)·보통문(普通門)·차문(車門)·애련당(愛蓮塘)·용산(龍山)·마탄(馬灘)이 기본 제재로 전승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연광정과 한사정(閑似亭) 등이 각광받으면서 즐겨 그려지는 경향을 보였다.

현황

평양기성도는 국내외 공사립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개인 소장품으로 흩어져 전하고 있다. 대형 기성도 병풍만 수십 점에 달하며, 화첩 혹은 낱폭으로 보관 중인 작품도 적지 않다. 그 동안 평양기성도에 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관련 연구가 본격화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향후 새로운 유물의 발굴 노력이 필요하며 연구 과제도 많은 편이다.

의의와 평가

평양은 고조선 이래로 여러 왕조가 터를 잡은 역사적 고도(古都)이자 조선시대 서울 다음가는 지방의 거점 도시였다. 평양기성도에는 그와 같은 평양의 역사적 자취와 시대적 위상을 드러내는 경관이 재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 땅에 실재하는 경관을 담은 그림이라는 예술적 영역을 넘어서 역사적·문화적 사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참고문헌

『평양지(平壤志)』(윤두수)
『평양속지(平壤續志)』(윤유)
『기성도병』(서울역사박물관 편, 2019)
『조선시대 평안도 함경도 실경 산수화』(박정애,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4)
「조선 후기 평양 명승도 연구─《평양 팔경도》를 중심으로」(박정애, 『민족문화』 39, 2012)
「18~19세기 기성도 병풍 연구」(박정애, 『고문화』 74, 2009)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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