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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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나 의례의 부정을 예방하고자 병자나 임산부를 마을에서 격리하고자 임시로 마련한 거처.
이칭
이칭
산막(産幕), 해막(解幕), 병막(病幕), 피병소(避病所), 출막(出幕), 피접(避接), 구질막(救疾幕)
내용 요약

피막은 전염병이나 의례의 부정을 예방하고자 병자나 임산부를 마을에서 격리하고자 임시로 마련한 거처이다. 이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동제의 부정을 막아, 사전에 부정을 예방하여 주민의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산막(産幕), 해막(解幕), 병막(病幕) 등이라고도 한다. 과학 기술과 의술의 발달로 사라졌다.

정의
전염병이나 의례의 부정을 예방하고자 병자나 임산부를 마을에서 격리하고자 임시로 마련한 거처.
개설

피막(避幕)은 전염병이 있을 때나 주2를 행할 때 부정을 예방하고자 환자나 임산부를 마을에서 격리할 때 사용하는 임시 거처용 움막이다. 이는 지역에 따라 산막(産幕) 또는 주3이라고도 한다.

전통 주4에서는 주5의 노여움을 달래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동제(洞祭)를 지낸다. 마을신을 노하게 하는 부정에는 사람과 동물의 출산인 산 부정과, 사람이 죽는 죽은 부정이 있다. 초상 당하는 일은 예측할 수 없지만, 출산은 예측할 수 있어 동제 20일 전쯤에 해산이 가까운 임산부를 마을 밖에 마련된 피막으로 내보내 부정을 막는다. 이 기간 동안 임산부는 마을에서 마련한 산막에서 해산한 후, 3일 정도가 지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산막은 마을 제의 부정을 방지하고자 임산부를 잠시 피난하게 하는 임시 거처이기에 움막처럼 지었다가 사용 후 헐어 버리기도 한다.

산막 또는 해막은 서해안 도서 지역에서 1950년대까지도 많이 있었는데, 외연도에서는 움막 같은 해막에 20여 명이 모였다는 보고도 있다. 고대도에 사는 안ㅇㅇ 씨는 자신이 이 산막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1973년에 조사된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장고도의 해막은 원래 대머리라는 곳에 있는 김ㅇㅇ 씨의 개인 가옥을 사용하고 주1. 이 산막에는 산막을 지키는 산막지기가 있었고, 600여 평의 산막답(産幕沓)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산막은 1960년대 독립 가옥 집단 이주 주7새마을운동으로 헐리게 되었다. 이에 1973년 삽시도리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장고초등학교 옆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은 마을과 주8를 지내는 주9에서 보이지 않는 곳이다. 새로 지은 산막은 온돌방 2개에 부엌 하나의 구조인데, 폭은 2.45m이고, 길이는 6.17m의 시멘트 주10에 슬레이트 주11이다.

같은 해에 충청남도 보령 원산도 진촌의 해변인 애막고랑이라는 곳에 있었던 해막이 조사되었다. 음력 12월 초부터 1월 중순 사이에 출산이 예정된 임산부는 모두 해막으로 피신하였다가 거기서 해산한 후 마을제가 끝나면 귀가하였다고 한다.

1993년에 조사된 충청남도 보령 외연도의 해막은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규모는 2칸이다. 해막에는 많으면 3~4명 정도가 함께 했다고 한다. 해막에서 해산한 아이를 해막동이라 하고, 마을에 돌아오면 먼저 갯벌의 흙을 아이 이마에 찍어 부정을 막았다고 한다.

이러한 해막은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서해안 도서 지역에 많았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외딴집 폐쇄 정책 등으로 마을제와 함께 모두 사라졌다.

연원 및 변천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환자를 격리하는 피막이라는 용어는 전염병이나 부정을 피한다는 의미로 편의상 사용된 조작적 용어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일기 등의 기록에 피막이란 용어는 보이지

병막주12이란 단어가 태종 16년(1416)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 등장하여 이후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용어로 사용된다. 병막의 관리는 비변사, 진휼청, 한성부 등에서 하였다. 하나의 병막에 1~2명이 거주하면서 병막의 신구(新舊) 상황, 환자 수, 향차, 병사 등의 내용을 자세히 확인하여 보고하였다. 병막을 지키는 것은 주13의 일이었다.

1788년(정조 12) 5월에서 6월 사이에 서울에서 주14 의심 환자가 발생하였다. 한성부에서 5일마다 역병의 상황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그중 5월 24일자 보고에는 중부는 환자 96명을 교외에 있는 병막으로 주15, 동부는 132명을 58곳에, 서부는 163명을 97곳에, 남부는 660명을 272곳에, 북부는 320명을 출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활인서에는 12명, 서활인서에는 17명의 환자를 격리하였다고 한다.

5월 30일자 보고서의 주16에 따르면,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중부에서 역병에 걸린 125명을 출막하였는데, 이는 교외에 있는 병막으로 내보냈다는 말이다. 동부는 환자가 193명이었는데, 회복하여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이 7명, 사망한 사람은 2명이었고, 병막은 모두 96곳이었다. 서부는 환자 253명 중 회복한 사람이 34명, 사망한 사람이 4명, 병막은 모두 118곳이었다. 남부는 환자 807명 중 회복자 18명, 사망자 13명, 출막한 장소는 339곳이었다. 북부는 환자 362명 중 회복자 11명, 사망자 4명, 출막한 장소는 153곳이었다. 또한 동활인서는 23명, 서활인서는 28명을 출막하였다고 한다.

병막은 기존의 것을 사용하기도 하고, 철거하기도 하며 새로 짓기도 했다. 『일성록(日省錄)』 「1788년 5월 30일」에 따르면, “동부와 남부는 구막(舊幕)이 397곳, 신막(新幕)이 51곳이며, 그중 3곳은 철거하여 현재 병막은 445곳이다.”라고 하였다. 빠진 곳이 있어 확실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서울 외곽에는 수백 곳의 병막이 있었다.

당시 비변사 주17이었던 유상엽(柳相曄)의 수본(手本)에는 병막의 형태와 운영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병막은, 주18으로 지붕을 만들어 비를 맞지 않도록 하였고, 바닥에는 거적을 깔아 주19를 면하도록 하였다. 그때는 비변사와 진휼청이 공조하여 병막을 관리하고

민간주20에서는 병막을 빌려서 활용하였다. 노상추(盧尙樞, 1746~1829)는 정조 17년(1793) 4월 5일 하인이 병에 걸려 이웃의 주21로 보냈는데, 동(銅) 120을 냈다고 한다. 또 마을 주민이 스스로 병막을 지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묵재일기』에는 명종 14년(1559) 1월 21일 “마을 사람들이 우물가에 병막을 지었으니 판관에게 알려 옮기게 해달라고 하여 바로 편지했더니 처리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활인서(活人署)에서는 주22를 설치하여 주23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는 전염병을 막는 방역책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피병소를 한양에서는 성 밖에, 지방에서는 인적이 드문 산속이나 들판에 설치했는데, 피병소는 일반인보다는 왕실이나 관료들의 질병 피난처였다.

18세기 활인서와 혜민서의 질병 치료는 전염된 환자를 일반인들로부터 격리하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주24은 “환자가 생기면 즉시 그들을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집에 데려다가 격리한다.”라고 하였다. 환자를 격리하는 일은 출막(出幕)이라 하였다. 제주도에서는 해변에 구질막(救疾幕)을 설치하여 나병 환자를 치료하였는데, 기건(奇虔, ?~1460)이 제주 목사 때 설치하여 칭송받았다.

『묵재일기(墨齋日記)』에는 병을 피하는 일을 피접(避接)이라고 하였다. 명종 7년(1552) “날이 저문 후에 피접하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 처남의 댁을 알현하고 조문했다.”라는 등의 피접 기사가 많다.

한편, 피병소 제도는 1930~4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최병채일기(崔炳彩日記)』에서 1936년 6월 3일자에 “병자 조사 후 빈집을 빌리려고 하였는데, 조상돈이 살던 옛집을 허락받아 임시 병막으로 사용하려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49년 12월 9일에는 “예방 접종을 한 후에, 벌채장의 기숙사를 임시 병막으로 하여 환자를 수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방 접종이 도입되었던 근대까지도 피병소 제도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1980년 ‘피막’이란 제목으로 양반, 청상과부, 무당, 피막지기가 등장하는 영화가 제작되어 인기와 함께 많은 상을 받았다. 피막은 전염병이나 부정을 예방하고자 당사자를 격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예방책이었다. 그러나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이러한 피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묵재일기(墨齋日記)』
『최병채일기(崔炳彩日記)』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군영등록(軍營謄錄)』

단행본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충남편』(국립문화재연구소, 1975)
레드야드 편, 朴允熙譯, 『하멜표류기-조선왕국견문록』(삼중당문고, 1975)
『사진으로 보는 민속의 어제와 오늘』 3(국립민속박물관, 2003)
이두현·장주근·이광규, 『한국 민속학 개설』(일조각, 2015)

논문

권복규, 「조선 전기 역병에 대한 민간의 대응」(『의사학』 8-1, 대한의사학회, 1999)
김호, 「시골 양반 역병(疫病) 분투기-18세기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역사비평』 131, 역사비평사, 2020)
김호, 「정조 대의 방역(防疫): 안전과 호혜의 모색」(『민속학연구』 49, 국립민속박물관, 2021)
이규근, 「조선후기 疾病史 연구-『朝鮮王朝實錄』의 전염병 발생 기록을 중심으로」(『국사관논총』 96, 국사편찬위원회, 2001)
이필영, 「충남 서해 도서지방의 당제 연구」(『국사관논총』 82, 국사편찬위원회, 1998)

인터넷 자료

디지털장서각(https://jsg.aks.ac.kr/)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kr/main)
주석
주1

해막의 현지 조사 내용은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충남편』, 국립문화재연구소, 1975; 『사진으로 보는 민속의 어제와 오늘 3』, 국립민속박물관, 2003; 이필영, 「충남 서해 도서지방의 당제 연구」, 『국사관논총』 82, 국사편찬위원회, 1998의 내용을 참조하였다.

주2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 또는 정하여진 방식에 따라 치르는 행사. 우리말샘

주3

부정(不淨)을 막기 위하여 임산부의 해산에 임하여 따로 세우는 오두막. 우리말샘

주4

사회 구조가 분화되지 않고 단순하며 개인의 권리보다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공동체의 질서나 가치관이 중시되는 사회.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연(地緣) 집단으로서의 촌락이나 혈연 집단으로서의 가족이 커다란 사회적 역할을 하는 사회이다. 우리말샘

주5

마을을 지켜 주는 신. 산신당이나 서낭당에 모신다. 우리말샘

주7

어떤 정책을 시행함. 또는 그 정책. 우리말샘

주8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지켜 주는 신인 동신(洞神)에게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 마을 사람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며 정월 대보름날에 서낭당, 산신당, 당산(堂山) 따위에서 지낸다. 우리말샘

주9

토지나 마을의 수호신이 있다고 하여 신성시하는 마을 근처의 산이나 언덕. 우리말샘

주10

건축용 블록의 하나. 시멘트, 골재, 물을 혼합하여 규격이 일정한 틀에 넣고 진동과 압력을 가하여 만든다. 우리말샘

주11

슬레이트를 인 지붕. 우리말샘

주12

전염병 환자를 격리하여 수용하는 임시 건물. 우리말샘

주13

군대가 주둔하는 곳. 우리말샘

주14

역병균의 공기 전염으로 생기는 농작물의 유행병. 잎에 어두운 녹색 반점과 흰 곰팡이가 생기며, 마르면 갈색이 된다. 감자, 담배, 토마토 따위에서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주15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격리하여 수용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막을 치고 옮기다. 우리말샘

주16

임금에게 올리는 주본(奏本)에 덧붙이던 문서나 인명부. 우리말샘

주17

조선 시대에, 정오품 통덕랑 이하의 당하관을 통틀어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18

짚을 두툼하게 엮거나, 새끼로 날을 하여 짚으로 쳐서 자리처럼 만든 물건. 허드레로 자리처럼 쓰기도 하며, 한데에 쌓은 물건을 덮기도 한다. 우리말샘

주19

물에 젖거나 잠김. 우리말샘

주20

일반 백성들 사이. 우리말샘

주21

의식이나 거둥 때에 임시로 장막을 쳐서, 왕이나 고관들이 잠깐 머무르게 하던 곳. 우리말샘

주22

병을 피하여 거처를 옮긴 곳. 우리말샘

주23

병을 고치는 데 쓰는 약. 우리말샘

주24

헨드릭 하멜, 네덜란드의 선원(?~1692). 동인도 회사 소속 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폭풍으로 파선하여 조선 효종 4년(1653)에 일행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14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고 귀국하였다. 자신의 경험을 담은 ≪하멜 표류기≫를 저술하여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따위를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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