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숙행(叔行). 홍수제(洪受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우전(洪禹傳)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계희(洪啓禧)이며, 어머니는 김취로(金取魯)의 딸이다.
1751년(영조 2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로 있던 1753년에 학문으로 이름이 높아 이듬해 세자시강원 관원의 구임(久任: 특정한 기술·경험·자격을 필요로 하는 관직은 임기에 관계없이 유임시키던 제도)을 논하는 자리에서 발탁, 출륙(出六: 육품 관직에 오름.)되어 수찬(修撰)에 임용되었다.
수찬 재직시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이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기를 주장한 의리와 송준길(宋浚吉)이 대의(大義)를 함께 협찬한 공을 논해 종사(從祀)하기를 주장하였다. 1755년 문학을 거쳐 재차 수찬직을 맡았다가 정언을 지냈다.
이듬해 부교리로 재직 중 이언형(李彦衡)과 김상도(金相度)의 당인(黨人)으로 낙인찍혀, 삭거사판(削去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됨)되고, 아울러 아버지 홍계희(洪啓禧)도 판윤에서 경성부사(鏡城府使)로 밀려났다.
그러나 곧 부수찬에 복귀했다가 이듬해 경기어사(京畿御史)를 거쳐 영광안핵어사(靈光按覈御史)로 파견되어 대동미의 납부를 일시 정지하도록 하였다. 이어 충청도 단양·회인 안집어사(安集御史)로 파견되어 진휼에 힘썼고, 호서안집어사(湖西安集御史), 충청도 청안안집어사(淸安安集御史)로 파견되어 흩어진 백성을 안집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과천삼강어사(果川三江御史)·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등을 지냈다. 정언 박지원(朴志源)의 탄핵으로 부자(父子)가 함께 곤욕을 치른 뒤 여러 번 삼사(三司)의 관직을 사직했기 때문에 그를 내쳐서 금성현령(金城縣令)으로 제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