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경이(敬以). 홍우적(洪禹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현(洪鉉)이고, 아버지는 홍득제(洪得濟)이며, 어머니는 이정항(李廷恒)의 딸이다. 병조참의 홍득후(洪得厚)에게 입양되었다.
1750년(영조 26) 성균관 취사(取士)에 뽑혀 직부전시(直赴殿試)하라는 은덕을 입어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1760년 지평(持平)으로 재직 중 이조참판 조명채(曹命采), 한성우윤 이태화(李泰和) 등을 탄핵, 배척하였고, 이어 정언(正言)으로 옮겼으나 지평 이창임(李昌任)의 탄핵으로 체차되었다.
1762년에는 병조정랑으로 재직 중 공화(公貨)를 함부로 낭비하였다는 지평 신익빈(申益彬)의 탄핵으로 체차되었다가 이듬해 지평으로 복귀하였고, 1766년 장령으로 있으면서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을 탄핵하였다.
그 뒤 헌납·정언을 거쳐 장령 재직시 성인의 예율(禮律)을 어겼다는 이유로 채제공(蔡濟恭)의 탄핵소를 올려 영조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어 집의를 거쳐 사간으로 있다가 지평 유훈(柳薰)의 탄핵으로 삭판(削版: 삭거삭판의 줄인 말로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됨.)되었으며, 이듬해 사간으로 복귀한 뒤 집의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