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의정부좌참찬,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군실(君實)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3년(경종 3)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풍산(豊山)
주요 관직
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판의금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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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의정부좌참찬,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실(君實). 홍주문(洪柱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만기(洪萬紀)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중후(洪重厚)이며, 홍중효(洪重孝)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6년(영조 3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758년 승지에 발탁되고, 1762년에는 승지로 있으면서 영조의 명으로 예문관 현판(懸板)을 썼다.

이 해 5월 부교리로 옮겼다가 이어 부수찬·교리 등을 거친 뒤 사간원헌납·사헌부지평을 지냈다. 부교리 때 제술(製述) 시험에서 장원해 초피립(貂皮笠: 방한용으로 모피로 만든 삿갓)과 이엄(耳掩: 모피로 만든 방한용 귀덮개)이 하사되었다.1768년(영조 44) 사헌부장령을 거쳐 교리·부수찬 등을 거쳐 이듬해 사간에 올랐다.

그러나 기생을 데리고 살았다는 이유로 횡성(橫城)으로 투비되었다가 태묘(太廟) 삭제(朔祭)의 사전(赦典)으로 석방되어 사간에 복직하였다.

이어 집의·부교리·수찬을 거쳐 필선(弼善)으로 재직 중 세자를 잘 보필한 공으로 대록비(大鹿皮) 1령(令)이 하사되고, 1774년(영조 50) 승지로 재발탁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경기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로 파견되었다가 1781년(정조 5) 대사간에 임명되고, 이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듬해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로 파견되었으나 판서 권이진(權以鎭)의 서족(庶族) 조카이던 공산(公山)의 업유(業儒) 권홍징(權泓徵)의 흉소(凶疏)로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1785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대론의 문제로 한차례 파직 후 복직되고, 이어 대사간, 비변사제조 등을 두루 거쳤다. 이듬 해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으로 재직할 당시 시파의 영수이던 채제공(蔡濟恭)을 탄핵해 배척하였다.

그러나 경기관찰사로 있을 당시인 1788년 정조의 화성 행차시 선창(船艙) 축조(築造)가 부진한 책임 소재에 대한 우의정 채제공의 탄핵으로 파직 정배되었다가 그 해 말에 방면되었다.

그 뒤 대사헌, 강화부유수·예조참판·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거쳐 1793년(정조 17) 의정부좌참찬에 올랐다. 이듬 해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가 1795년 벼슬에서 물러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간헌(簡憲)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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