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고 연죽사(煙竹寺)라 하였던 것을 고려 중기에 주1가 현재의 위치 가까이로 옮겨서 중창하고 영장사(靈藏寺)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불 타 버린 후, 1638년(인조 16) 승려 계원(戒元)과 영철(靈哲)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화방사라 하였다. 1713년까지 중창이 계속되었으나 1740년에 다시 화재로 다수의 전각이 전소하였다. 대규모의 시주와 협력으로 1741년에서 1742년까지 복구, 성장하였으며, 1818년 일부 건물이 다시 중창, 이건되는 등 형세가 안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조와 정조 때의 고승인 가직(嘉直)이 머물면서 갖가지 주2을 남겼다. 조선 후기 화방사의 주된 임무는 1663년 사액된 남해 충렬사(忠烈祠)의 수호였으나, 절에 소장된 기록물 분석을 통해 제지(製紙)와 서적 간인(刊印) 활동도 역으로 수행했음이 확인된다. 남해 지역의 관청, 향교로부터 서울의 각사까지 다양한 종이를 제작, 납품했다.
현존하는 주3로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주4, 명부전과 조사전, 극락전, 나한전, 범종각, 일주문, 삼성각이 있으며, 2010년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주5과 주6 등이 있다. 본래 법당은 1974년 경상남도 시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보광전(普光殿)이었다. 보광전은 정면 3칸에, 내부의 구조와 조각이 조선시대 법당의 특징을 잘 나타냈으나 1981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1984년 법당을 복원하면서 대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정문화재로는 2010년 경상남도 시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남해 화방사 석조 석가삼존십육나한상(石造釋迦三尊十六羅漢像)과 남해 화방사 지장시왕탱, 독성탱, 남해 화방사 건륭32년 동종(乾隆三十二年 銅鍾)과 조선 후기 남해 화방사 동종(銅鍾), 남해 화방사 청동 반자(靑銅飯子)가 있으며, 같은 해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바라, 시루, 원패(願牌), 향완(香垸), 삼재부(三災符) 목판(木板) 등이 있다.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은 2010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으나 2022년에 지정 해제되고 같은 해 시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절에는 옥종자(玉宗子)와 2,000자로 된 이충무공 비문 목판(李忠武公碑文木版)도 있었다. 옥종자는 사찰이 건립되어 불상을 봉안할 때 불을 밝히는 옥돌로 만든 등잔이다. 한 번 불을 붙이면 깨뜨려서는 안 되고,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붙여서는 안 된다. 이 옥종자는 1234년(고종 21) 이전에 만들어져 불이 점화된 뒤 임진왜란 때 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름 24㎝, 높이 12㎝, 두께 2㎝, 무게 3.9㎏, 용량은 3ℓ이다. 1981년 보광전 화재 이후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이충무공 비문 목판(李忠武公碑文木版)은 1981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1997년 높이 3m, 너비 1.60m 규모의 붉은 소나무판에 복원하였다.
이 절은 용문사 · 보리암과 함께 남해군의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절 주위에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산닥나무가 자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