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사(水多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주1이다. 『수다사약전(水多寺略傳)』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때인 830년(흥덕왕 5) 진감 주2가 연악산 상봉인 미봉(彌峯)에 주3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절을 창건하여 연화사(淵華寺)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976(경종 1)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극락전과 청천료(淸泉寮)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185년(명종 15)에 각원(覺圓)이 금강문(金剛門) 등 3문(門)을 세우고 극락전과 청천료를 옮겨 지었으며, 비로전(毘盧殿) · 나한전(羅漢殿) · 시왕전(十王殿) · 미륵전(彌勒殿) · 봉황루(鳳凰樓)와 방사(房舍) 24개, 수선사(修禪社) 등을 신축하고 절 이름을 성암사(聖巖寺)라 하였다. 이 때 42성관음대법회(四十二聖觀音大法會)를 9,000일 동안 개설하고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하였는데, 승속 수만 명이 참여하였다.
1273년(원종 14)에 큰 주4로 극락전 · 시왕전 · 청천료만 남고 모두 주5 1572년(선조 5)에 사명당(泗溟堂)은 극락전을 주6 뒤 대웅전이라 개칭하였고, 청천료를 수리하여 극락당이라 하였다. 또 만세루(萬歲樓) 24칸과 안심료(安心寮), 9개의 대방(大房)을 신축하고 절 이름을 수다사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수다사에서 1만여 명의 의승(義僧)이 모여 의국법회(義國法會)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1704년(숙종 30)의 화재로 경내에 있는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조선 전기 김수온(金守溫)이 남긴 「수다사상전기(水多寺相傳記)」에 따르면 화엄승통(華嚴僧統) 화옹(和翁)에서 시작하여 해유(海乳), 성관(性寬), 학의(學誼)에 이르기까지 주7을 주지(住持)한 사원이라 하였다. 조선 성종 무렵 학의가 주지할 때에는 장년춘추수륙지보(長年春秋水陸之寶)가 설치되어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지원도 받았다.
현존 주8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산신각, 요사채, 일주문 등이 있다. 명부전은 1979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현, 유형 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1981년에 보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칸의 주9 주심 포계 주10 건물이다. 수막새와 암막새의 주11으로 1748(영조 24)년에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을 새로 조성하면서 그 부재를 사용하여 지었다. 내전에는 우물마루를 깐 바닥 위에 주12을 조성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좌우 주13를 시립시켰으며, 불단 좌우에는 명부 시왕상(十王像)이 각기 좌립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2002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이 있다. 구미 수다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함께 조성된 대세지보살상에서 나온 주14 유물을 통해 1649년(인조 27) 희장(熙藏) 등의 조각승에 의해 조성되었음이 알려졌다. 본래는 삼존상이었으나 양 주15는 외부로 반출되어 대세지보살상은 구미시 원각사에 봉안되어 있다. 함께 조성한 관세음보살상은 대구광역시 서봉암으로 이안하였다고 하나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구미 수다사 영산회상도 (龜尾 水多寺 靈山會上圖)는 대웅전의 불상 뒤에 놓여 있던 후불 탱화이다. 주16에 의하면 이 불화는 도익(道益), 혜학(慧學), 신초(信初), 처한(處閑) 등 4명의 주17 주18가 1731년에 조성한 것으로, 201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2003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현,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된 수다사 건륭37년 명동종(水多寺乾隆37年銘銅鐘)은 주19이 있어 1772이라는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