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건물. 「화암사중창기」에 의하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생존하였던 무과 출신의 성달생(成達生)이 1425년(세종 7) 이 사찰을 중창하여 개채(改彩)하고 확장할 것을 기획하여 1429년에 마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의 사찰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동쪽 고개에 원효대(元曉臺)가 있었고, 남쪽 고개에는 의상암(義湘庵)이 있었다고 한다. 이 중창기는 석비로 세웠는데 건립연대가 1572년(선조 5)이다.
극락전은 그 앞에 내정을 건너 남북축을 맞추어 마주보고 있는 우화루(雨花樓)와 같이 세워져 있는데 마당에서 75㎝ 높이의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自然石)의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지름 약 60㎝되는 기둥을 밑에서부터 민흘림으로 세웠다. 내부는 내고주(內高柱) 없는 통간 대량(大樑)을 걸쳐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건물의 정면은 빗살문으로, 중앙간은 네짝분합 그리고 협간(夾間)은 세짝문으로 되어 있다. 또, 동서의 양쪽에는 앞쪽에 출입문을 한 짝씩 달고 나머지는 벽체로 되어 있으며, 후면 서쪽 협간 및 중앙간에는 다같이 벽 중앙부에 문짝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건물 내부 중앙간 후측에는 소박한 불단(佛壇)을 마루 위에 놓고 극락전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봉안하고 그 위에 닫집을 올려놓았다.
단청은 내외부 모두 화려한 금모로단청(錦毛老丹靑: 부재의 양끝에 주된 단청을 하고 중간에 여러 가지 비단 무늬를 그린 단청) 단청을 하고 있으며, 가구는 다포계의 맞배집으로 창방은 전후면만 둘러져 있고 측면에는 툇보와 같이 고주에 연결되어 있다. 전면과 후면에는 평방 위에 포작(包作)을 배열하였는데, 외이출목 내삼출목으로 볼 수 있으나, 이 포작 위에는 덧서까래와 같은, 이른바 하앙(下昻)이 내부에서부터 길게 뻗어나와 있다.
이러한 하앙구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로서는 단 하나뿐이다. 이 구조는 하앙부재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써 온 것으로 알려졌고,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비슷한 구조의 실례가 많이 남아 있다.
1981년 이 건물 해체 보수 때 알려진 중앙부 종도리와 장여에 기록된 상량문에 의하면, 1605년(선조 38) 6월 초8일〔萬曆 三十三年 乙巳六月 初八日〕에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1980년 6월 11일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11월 28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고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