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외암마을 ( 마을)

아산 외암마을
아산 외암마을
주생활
지명
국가유산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는 예안이씨 집성촌.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아산 외암마을(牙山 外巖마을)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마을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민속문화유산(2000년 01월 07일 지정)
소재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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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는 예안이씨 집성촌.
개설

외암마을은 조선중기 이후 예안이씨가 주성이 되었는데, 조선시대 집성마을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어 2000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집성마을은 종가, 서낭당 장승과 같은 신앙시설, 서원이나 서당과 같은 교육시설, 농경지 방앗간과 같은 생산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명칭 유래

외암마을 서쪽에 위치한 송악면 소재지 인근에 조선 초기부터 시흥(時興)이라는 역(驛)이 있었다. 이 시흥역의 말을 거두어 먹이던 외양간이 외암마을에 있었다고 하여 예부터 ‘오양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외암’이라는 이름은 바로 오양골의 ‘오야’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환경

마을 뒤쪽에 높게 설화산(해발 441m)이 솟아 있고, 그 설화산 자락이 동남쪽으로 감돌아 낮은 산이 되면서 마을의 동쪽을 감싸듯 자리잡고 있다. 설화산 남서편 자락이 급하게 내려와 마을 뒤쪽에서 끊어지면서 약한 구릉을 형성하게 된다. 이 설화산 서남쪽 구릉지에 외암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산이 감싸고, 이 산과 마을 사이에는 설화산 계곡에서부터 흘러온 개천이 마을 앞에서 광덕산으로부터 흘러온 개천과 합쳐져서 서북쪽으로 흘러가다가 마을 서남쪽에서 근대골내로 합수된다. 근대골내 주변에는 넓은 평촌들이 펼쳐져 있다. 마을 남서쪽은 마을을 에워싸는 산이 없고 낮은 구릉만 있는데 외부에서 마을이 노출되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곳에 마을을 보호하는 비보숲을 조성해 두었다. 마을 서쪽에는 면소재지가 있고, 그 사이에 남-북 방향으로 국도가 나있다.

마을의 전체적인 형상은 완만한 구릉지에 서남-동북으로 긴 장축의 타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마을의 가옥은 대부분 서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 입구의 다리를 건너면 설화산 방향으로 길게 마을 안길이 있고 이 안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좌우로 샛길이 나 있는데, 이 안길과 샛길을 따라 가옥이 자리잡고 있다. 그 형상은 나뭇가지가 큰 줄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작은 가지가 뻗고 가지 끝에 열매가 맺어 있는 것과 같은 자연형태의 배치를 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외암리에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기록에는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미 500여년 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예안이씨의 족보와 이간의 「외암기」에 의하면, 원래 외암마을에는 평택진씨가 살고 있었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묘가 외암마을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골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평택진씨가 외암마을에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지금도 이 마을 예안이씨 문중에서 진한평의 묘를 잘 관리해 오고 있다.

예안이씨가 외암마을에 처음 입향한 것은 진한평의 사위인 예안이씨 이사종(李嗣宗)이다. 당시 진한평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이사종이 진한평의 장녀와 혼인하면서 마을에 입향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이 마을의 주성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외암마을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외암이간(李柬, 1677∼1737)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988년 이 마을은 전통건조물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11년에는 세계유산잠정목록에 등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황

마을에는 현재 69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주민 수는 모두 192명(남자 103명, 여자 89명)이다. 마을 내 가옥 수는 모두 213동이며, 이 중 한옥기와 건물 57동, 초가 128동, 돌기와 2동, 양와 11동 기타 15동이다. 마을 내 건물 중에는 반 이상이 초가로 되어 있다. 마을 내에는 조선시대 전통적인 양반주택, 중규모의 농가, 소규모 농가 등이 한데 어울려 마을을 이루고 있다.

돌담은 외암마을의 특징으로, 마을 내 모든 가옥은 돌로 담장을 둘렀다. 지질조건상 마을 지표면에 수많은 괴석(塊石)이 형성되어 있는데, 담장에 사용된 돌은 마을 현지에서 채취 것으로 총 연장은 약 6㎞이다. 또한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돌을 걷어내어 논밭의 축대를 쌓기도 하였다.

마을 안에는 3개의 정자나무가 있다. 첫 번째는 마을입구의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있고, 두 번째는 마을 안길을 들어서 조금 가다가 첫 샛길로 연결되는 고삳에 있으며, 마지막 세 번째는 마을 후면의 가장자리인 개천 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안길에 있는 나무는 신성시되는 나무로 동제를 지낼 때, 마을축제를 할 때 이곳에서 제를 지낸다. 마을 입구와 후면에 자리잡고 있는 나무는 주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해준다.

외암마을에는 설화산 계곡에서 마을의 남측으로 흘러 근대골 내로 진입하는 자연개천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수로가 있다. 자연개천은 마을풍수에서 내수(內水)가 되며, 인공수로는 풍수에서의 염승(厭勝)적 의미로 만든 것이다. 인공수로는 마을 상부의 자연개천에서 물길을 따서 마을 내 각 가옥을 통과하도록 만들었다. 이 물길은 생활용수가 되기도 하고 마당을 지나면서 곡수(曲水)와 연못을 만들어 정원을 꾸미기도 한다. 마을 안을 흐르는 수로가 정작 화재 시에는 방화수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을의 주산인 설화산(雪華山)은 ‘화산(火山)’으로서 그 ‘화’의 기운이 마을에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화와 상극하는 ‘물(水)’을 마을로 끌어들여 ‘화’의 기를 제압하자는 뜻에서 만든 것이다. 이를 풍수에서 ‘염승(厭勝)’이라고 하는데,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 스스럼없이 적응해 나가기 위한 빼어난 착상이라고 사료된다.

마을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반가 정원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주로 대규모 반가의 사랑마당에 정원을 꾸며두었는데 이 정원은 돌담, 인공수로와 함께 이 마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장승제와 동제를 지내고, 2000년부터 매년 가을 짚풀축제를 하고 있다. 짚풀과 관련된 주제와 함께 전통놀이, 음식, 전시회 등이 이루어진다. 마을을 찾아오는 방문객이 년간 약 30만 명 정도가 된다.

참고문헌

『외암집(外岩集)』
『외암민속마을』(이왕기, 아산시, 2009)
『아산외암민속마을 종합정비계획』(아산시, 2002)
『한국의 건축문화재-충남편-』(이왕기, 기문당, 1999)
「아산 외암마을의 주거변화에 관한 연구」(이왕기 외, 『건축역사연구』10-3, 2001)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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