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형의 제화갈라(提和竭羅)와 미륵(彌勒)이 협시한 삼세불(三世佛)이다. 이러한 삼존상은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16나한을 모신 응진전 또는 나한전의 주존으로 봉안되었지만, 부산 범어사(梵魚寺)와 여수 흥국사처럼 대웅전에 봉안된 예도 있다. 현재 흥국사에는 대웅전 이외에 나한전에도 같은 구성의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팔상전의 석가불상도 원래는 제화갈라와 미륵이 협시한 삼존상이었다고 한다.
흥국사의 대웅전, 나한전, 팔상전의 세 전각에 모두 제화갈라와 미륵이 석가불을 협시한 삼존불상이 봉안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사찰에서 불상을 봉안하는 관습과 다른 독특한 구성이다. 조선 후기 사찰의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석가불-약사불, 아미타불-비로자나불-약사불의 삼방불(三方佛, 횡삼세불) 또는 석가불-비로자나불-노사나불의 삼신불(三身佛)이 봉안되며, 제화갈라-석가불-미륵의 삼세불(三世佛)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에 십육나한과 함께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흥국사의 대웅전 삼존불에서는 조각가나 제작 연대를 알려주는 복장발원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좌우 협시상 보관에 ‘자씨보살대명숭정(慈氏菩薩大明崇禎)’, ‘제화보살대명숭정(提花菩薩大明崇禎)’이라는 명문이 나와 중국 명나라 숭정연간(崇禎年間, 1628~1644)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삼불상은 묵중한 신체와 양감이 강조된 얼굴, 통통한 팔과 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얼굴은 장방형이며, 눈두덩, 뺨, 턱에 양감이 잘 표현되었고, 두 다리 사이의 옷주름은 간략하며 지면과 닿는 하단은 물결치는 모습과 유사하다. 이런 표현법은 응원·인균파 조각승들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알려져 있으며, 두꺼운 손등과 얇고 긴 손가락 표현은 인균만이 즐겨 사용하던 표현법이다. 인균(印均)이 수조각승으로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다. 보살상 보관의 ‘숭정’연간의 조성 기록과 인균이 가장 활발한 조상 활동을 하였던 1630~40년이 일치한다는 점도 이 같은 추정을 가능케 한다.
또한 턱이 넓고 볼이 늘어진 모습은 1633년에 조성된 김제(金堤) 귀신사(歸信寺) 영산전 석가상보다는 1636년에 조성된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 노사나불상과 비슷하며, 두 다리 사이의 옷주름은 화엄사 노사나불보다 약간 복잡하고 귀신사 석가상과 유사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흥국사 대웅전의 삼세불상은 1633년의 귀신사 삼세불상과 1636년의 화엄사 노사나불상의 중간에 위치지울 수 있으며, 제작 시기는 1630년대 중반 즈음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