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전라남도 순천시 북쪽의 동리산 대흥사에 봉안되었던 불상이다. 언제, 어떤 연유로 현재 이곳에 봉안되어 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복장발원문과 불상 밑면에 첩부된 묵서 기록에 의하면, 1702년 대흥사에 봉안된 후, 19세기 대흥사가 폐사하면서 전남 구례의 오산사(鰲山寺)에 이안되었다가, 20세기 초반 극락암의 전신인 용학암(龍鶴庵)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복장에서 나온 백지묵서(白紙墨書)의 발원문에는 제작 시기와 봉안처, 존상의 명칭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복장공을 막은 덮개를 봉한 백색 종이에는 이 불상이 방광(放光)한 일을 기록한 별도의 한지가 붙여져 있는데 경술년(庚戌年)이라는 방광 시기와 오산사(鰲山寺)라는 봉안처가 나온다. 경술년이 언제인지 확정하기 어렵지만, 이 불상이 오산사에 있었던 근대기의 경술년은 1910년 외에는 없다. 보통 불상의 방광은 상서로운 일이 있거나,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일어나므로, 기록의 경술년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병탄된 1910년일 가능성이 높다. 오산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있는 사성암(四聖庵)의 옛 이름으로 판단된다. 사성암이 위치한 산이 곧 오산(鰲山)이며 일제강점기까지는 사성암을 오산사라 부른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성암은 이 불상의 원 봉안처인 대흥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무량음성왕불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불상 수십여 구가 봉안되어 있기도 하다. 복장발원문에 기록된 무량음성왕불은 108 참회문에 등장하는 53불 가운데 48번째 부처의 이름이다. 발원문에 조각승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이 불상과 함께 대흥사에 봉안된 것으로 확인되는 서귀포 정방사(正房寺)의 석조비사부불좌상(石造毗舍浮佛坐像)과 보성 용연사(龍淵寺) 석조구류손불좌상(石造拘留孫佛坐像)의 조성발원문에 ‘화원(畵員) 수일(守一)’이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의 조성자도 역시 수일로 판단된다. 그는 1675년부터 1711년까지 각종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이다.
이 석조무량음성왕불좌상의 전체적인 형태는 넓적한 얼굴과 안정적인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신체는 건장하며 당당한 느낌을 주는데, 몸체의 두께가 두꺼워 안정감이 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두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위로 향하게 하였다. 이는 1819세기 석상에서 많이 발견되는 간략화된 수인이다. 머리는 조선 후기 불상들이 약간 숙인 것과는 달리 세우고 있어 특이하다. 불상의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큰 편이며, 길이에 비해 폭이 넓다. 특히 두 눈은 얼굴 좌우에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사이에 폭넓은 코가 있다. 나발의 머리는 발제면에서 정상으로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발제면은 좁은 녹색 띠로 채색되어 있다. 머리 정상에는 낮고 작은 원통형의 계주가 있으며 육계와 머리의 경계면에는 반달형의 중간계주가 솟아 있다. 육계는 거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넓게 표현되었다. 발제면은 거의 일직선이며 턱도 뾰족하지 않아 전체 모습은 좌우로 긴 장방형을 띄고 있다. 이마 한가운데의 백호 조각을 제외하면, 나머지 눈썹, 수염 등은 모두 채색으로 처리하였다. 눈두덩은 약간 튀어나와 있으며, 그 하단부에 비교적 넓게 뜨고 있는 눈이 횡으로 음각되어 있다. 이마에서 코로 이어지는 선은 우묵한 곳이 없이 동일면으로 이어져 있다. 불상의 복제는 ‘군의(裙衣)-승기지(僧祇支)-부견의(覆肩衣)-대의(大衣)’의 순서로 착용하는 조선 후기 불상의 가장 일반적인 착의법이다. 승기지는 가슴에서 무릎 정도까지를 가려주는 옷으로, 이 불상에서는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로 나타나 있다. 승기지 위에 입는 부견의는 네모난 보자기 형태의 옷인데 이 불상에서는 가슴 하단에 수직으로 내려져서 오른팔을 감싸고 있으며 오른팔 아래에서 왼쪽 어깨로 향하는 대의에 의해 대의 속으로 사라져 있다. 가장 바깥에는 왼쪽 어깨를 가리고 목을 돌아 오른쪽 어깨와 가슴 일부를 가려주고 오른팔의 아래를 지나 다시 왼쪽 어깨를 넘어 등 뒤로 넘겨진 변형편단우견의 대의를 입고 있다. 속옷인 군의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이 불상이 제작된 당시의 불화를 참조하면 가장 안쪽에 치마 모양의 군의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불상의 옷이 다 그러하듯이, 옷은 매우 두꺼우며 옷 속에 감춰진 몸은 거의 드러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옷주름은 뚜렸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조각승 수일의 작품에 나타나는 옷주름의 특징은 오른쪽 가슴, 두 다리 사이, 왼쪽 정강이에 잘 나타나 있다. 오른쪽 어깨 아래에는 어깨로부터 수직으로 내려진 대의 자락이 34개의 주름을 이루며 수평으로 상박부 쪽으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 가슴에는 끝이 뾰족하고 폭이 넓은 독특한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다. 두 다리 사이의 옷주름은 좌우로 폭넓은 주름이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왼쪽 정강이에는 오른발 아래로부터 끝이 뾰족한 삼각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오른쪽 가슴과 두 다리 사이, 그리고 왼쪽 정강이의 옷주름은 17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활동하였던 조각승 승일(勝一)의 작풍과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