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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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인물
조선후기 선운사 목조삼방불좌상, 송광사 나한전 목조삼세불좌상 등을 제작한 승려. 수조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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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선운사 목조삼방불좌상, 송광사 나한전 목조삼세불좌상 등을 제작한 승려. 수조각승.
내용

17세기 전반의 가장 큰 조각승 유파인 무염파를 세우고 이끈 무염의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624년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 광원암(廣遠庵)의 목조아미타불좌상 조성발원문에 화주(化主)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1633년고창(高敞) 선운사(禪雲寺) 목조삼방불좌상 조성 불사에서부터 1656년완주(完州) 송광사(松廣寺) 나한전 목조삼세불좌상 조성에 이르기까지 수조각승으로 활동하였다. 무염파는 도우(道祐), 성수(性修), 해심(海心), 해기(敏奇), 도균(道均), 명조(明照), 경성(敬聖) 등 80여 명의 조각승들로 구성된 조선후기 최대의 조각승 유파였으며,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염파는 이미 1633년 고창 선운사 대웅전의 목조삼방불좌상 조성 불사에 유파의 구성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아, 늦어도 1620년대 말에는 유파가 구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630∼40년대의 초기 무염파의 활동은 1635년에 조성된 영광(靈光) 불갑사(佛甲寺) 대웅전의 목조삼방불좌상을 제외하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1650년대가 그의 전성기였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1650년에 제작된 대전(大田) 비래사(飛來寺) 대적광전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木造毘盧遮那佛坐像)과 1652년 작품인 완주(完州) 정수사(淨水寺) 극락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그의 대표작이다. 무염파의 1650년대 작품들은 팽팽한 양감이 강조된 얼굴과 신체, 그리고 양각과 음각이 함께 사용되어 도드라진 입체감이 잘 표현된 옷주름 등이 특징이다.

1650년대는 무염의 전성기이자 마지막 활동기인 것으로 판단된다. 1650년대에 들어 그의 제자인 해심이 수조각승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1651년에 조성된 속초(束草) 신흥사(新興寺)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과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좌상, 그리고 1654년 작품인 영광 불갑사 명부전의 목조지장보살좌상 등에서처럼 수조각승 무염의 특징과 함께 해심의 작풍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1650년대였기 때문이다. 무염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이며 무염파를 실질적으로 계승한 해심은 스승인 무염의 작풍을 계승하면서도 좌우대칭의 도식적인 옷주름과 두껍고 안정적인 하반신을 특징으로 한 불상들을 조성하였다. 1660년대 이후의 불상 가운데 무염파 작풍이 구현된 작품들은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어,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조각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17세기 무염파의 조상 활동」(송은석, 『역사학연구』 40, 2010)
「선운사 대웅보전 무염작 비로자나삼불상」(문명대, 『강좌미술사』 30, 2008)
「조각승 무염, 도우파 불상조각의 연구」(문명대, 『강좌미술사』 26-Ⅰ, 2006)
「무염파 목불상의 조성과 설악산 신흥사 목아미타삼존불상의 연구」(문명대, 『강좌미술사』 20, 2003)
집필자
송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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