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괘불도는 화면 중앙에 거대한 크기의 석가여래와 상부 왼쪽(향우측)의 다보탑과 다보불, 오른쪽(향좌측)의 시방불(十方佛) 만이 배치된 간단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괘불도 조성시 복장낭(腹藏囊)과 복장물(이상 1753년) 및 괘불함(1757년) 등이 함께 남아있다.
세로 길이가 12.6m나 되는 거대한 화면에는 본존인 석가모니가 화면에 꽉 차게끔 그려졌으며, 화면 상부 오른쪽(향좌측)에는 10명의 부처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 왼쪽(향우측)에는 구름 속에 우뚝 솟아있는 황금 탑 안에 앉은 다보불과 그 앞에 서있는 보살 1구가 작게 묘사되었다. 석가모니는 원형의 두광과 키형의 신광을 지니고 연화대좌 위에 서서 두 발을 약간 벌린 채 정면을 향해 당당하게 서있는데, 석가모니의 뒤쪽 하단에 뭉게구름이 묘사되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고 왼손을 가슴께로 올려 손바닥을 위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잡았는데, 아래로 내린 오른팔이 유난히 길다. 머리는 나발(螺鉢)이며 육계(肉髻)가 뾰족하며, 원형의 정상계주와 넓적한 반원형의 중간계주가 장식되었다. 얼굴은 가는 필선으로 윤곽과 이목구비를 묘사하였는데, 약간 아래로 쳐진 눈썹과 반쯤 뜬 눈, 적당한 크기의 코, 단정한 붉은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루었다. 신체는 매우 건장한 편으로, 어깨는 넓으면서 거의 직각으로 표현되어 다소 경직된 느낌을 준다. 착의법은 왼쪽 어깨에만 대의를 걸친 편단우견식(偏袒右肩式)이며, 대의의 가장자리와 이음새에는 호화로우면서도 다양한 모습의 화문으로 장식되었는데, 아래로 늘어진 대의자락은 좌우로 날카롭게 뻗어 있다. 두광은 청색과 적색의 색대(色帶)를 여러 겹 칠한 후 내부를 녹색으로 채색하였으며, 키 모양의 신광은 적색으로 테두리를 칠한 후 청색 바탕에 화문으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 내부를 흰색으로 마무리하였다.
이 괘불도는 18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승인 금어(金魚) 은기(隱奇), 치한(致閑), 내순(來淳), 모영(慕英), 지언(持彦)과 화사 즉민(卽琝), 월계(月桂), 봉찰(鳳察), 책화(策花), 계탄(戒坦), 쾌혜(快慧), 쾌윤(快允), 인계(印戒)가 함께 조성하였다. 이들은 이 괘불도와 함께 26점의 각종 불화를 제작하여 선암사와 부속암자 및 인근사찰에 봉안하였다.
이 괘불도는 화면에 꽉 차게 본존을 배치한 모습이라던가 뾰족한 육계에 표현된 정상계주와 중간계주의 형태, 편단우견식의 착의법, 원형의 두광과 키 모양의 신광,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는 본존의 모습 등에서 축서사 괘불도(1768년), 개심사 괘불도(1772년) 등 18세기 후반의 괘불도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준다.
괘불도와 함께 조성된 복장낭은 노란천으로 주머니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초록색 천으로 뚜껑을 달았는데 그 속에서 괘불발원문 3점과 33조사도 발원문, 동제 후령통(喉鈴筒), 황초복자(黃綃幅子), 일체여래심비밀진신사리보협인다라니(一切如來心秘密眞身舍利寶篋印陀羅尼), 종자도(種子圖) 등이 발견되었다. 발원문은 모두 세 점으로 그 중 푸른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발원문에는 ‘대각석가존(大覺釋迦尊), 다보탑중다보존(多寶塔中多寶尊), 백억분신백억존(百億分身百億尊)’이라고 적혀있어 괘불도 상단에 그려진 도상이 다보탑과 다보여래 및 백억분신백억존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흰색 한지에 먹으로 쓴 발원문에는 이 괘불도와 함께 제작된 불화 26점의 명칭과 불화제작에 소요된 기간이 명시되어 있어 괘불도 제작에 2개월이 걸렸음을 알려 준다. 후령통은 원통형으로, 내부에는 여러 가지 물질들로 채워져 있는 작은 원통 6개가 들어 있었으며, 겉에는 범자(梵字)가 쓰여져 있다.
괘불함은 나무에 옻칠을 해서 만든 것으로 가로 781cm, 세로 40cm, 높이 42cm의 규모로, 내부에 먹으로 명문이 적혀있어 괘불도가 제작된지 4년 후인 1757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목편수(木片手) 사선(思善), 붕환(鵬換)과 야장편수(冶匠片手)가 제작했다고 하나 야장편수의 이름은 박락되어 알 수 없다.
괘불도와 함께 제작된 복장낭과 괘불조성발원문 등의 복장유물 및 괘불도를 보관하는 괘불함 등이 함께 남아있어 조선후기에 괘불도 조성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