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신 동참제 계회도 ( )

회화
유물
국가유산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정사신(鄭士信)이 1583년부터 1587년 사이에 참여했던 모임 장면을 그린 6폭의 계회도(契會圖).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정사신 참석 계회도 일괄(鄭士信 參席 契會圖 一括)
분류
유물/일반회화/기록화/계회도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2005년 04월 15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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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정사신(鄭士信)이 1583년부터 1587년 사이에 참여했던 모임 장면을 그린 6폭의 계회도(契會圖).
개설

선조 때의 문신인 정사신(1558∼1619)이 1583년(선조 16)부터 1587년(선조 20)까지 5년 동안 참여한 모임을 기념해 제작했던 계회도 6폭을 모아 병풍 형식으로 꾸민 작품이다. 1583년경의 「괴원장방계회도(槐院長房契會圖)」와 「봉산계회도(蓬山契會圖)」, 1585년의 「태상계회도(太常契會圖)」, 1586년의 「예조낭관계회도(禮曹郎官契會圖)」와 「형조낭관계회도(刑曹郎官契會圖)」, 1587년의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로 구성되었다. 모두 비단 바탕에 수묵으로 그렸으며 크기는 각각 다르다. 「괴원장방계회도」는 세로 93.0㎝, 가로 60.0㎝이고, 「봉산계회도」는 세로 95.5㎝, 가로 61.0㎝이다. 「태상계회도」는 세로 93.0㎝, 가로 58.5㎝이고, 「예조낭관계회도」는 세로 94.5㎝, 가로59.0㎝이다. 「형조낭관계회도」는 세로 94.0㎝, 가로 60.0㎝이고,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는 세로 91.3㎝, 가로 58.9㎝이다. 2005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

내용

「괴원장방계회도」와「봉산계회도」는 1582년(선조 15)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정사신이 곧바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배속되어 일할 당시에 제작된 것이다. 그 중 「봉산계회도」는 1583년 가을, 왜사(倭使)의 호송 임무를 맡고 동래부(東萊府)에 파견되었을 때 동래부사가 현지에서 베푼 연회를 기념해 제작하였다. 당시 모임에는 5명이 참여하였는데, 동래부사 임윤신(任允臣)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정사신과 함께 과거에 합격한 동료 관원들이었다. 「괴원장방계회도」는 총 16명의 승문원 관원들이 참여해 가진 모임을 계기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승문원의 모든 관원들이 참여한 것이 아니고, 참여자는 정사신과 마찬가지로 1582년 식년시 합격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일종의 동방계회도(同榜契會圖)에 속한다.

「태상계회도」는 정사신이 1585년 국가의 제사(祭祀)와 시호(諡號)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으로 재직할 때 제작되었고, 이듬해 역임한 예조좌랑(禮曹佐郞)과 형조좌랑(刑曹佐郞) 시절에 「예조낭관계회도」와 「형조낭관계회도」가 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미원계회도」는 1587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된 후 제작한 것이다. 이상 4폭은 당시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신참례(新參禮)를 겸하는 회합을 계기로 그려진 동관계회도(同官契會圖)로 추정되고 있다.

「형조낭관계회도」의 경우 보존 상태가 불량하여 화면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으나 크게 3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관념산수를 배경으로 한 「태상계회도」는 근경에 돌출한 바위와 쌍송(雙松), 그 아래 상부가 평평한 모임 장소를 설정하고, 중경의 수면을 지나 원경에 산악을 배치한 편파구도이고 산과 바위 표면을 단선점준(短線點皴)으로 처리하여 16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안견파(安堅派) 화풍을 보여준다.

「봉산계회도」를 비롯해「괴원장방계회도」와 「예조낭관계회도」는 실경산수를 배경으로 한 사례이다. 「봉산계회도」에는 동래부 해안가 풍경이 펼쳐져 있고, 「괴원장방계회도」와 「예조낭관계회도」는 당시 계회 장소로 각광받았던 한강변 잠두봉(蠶頭峰) 일대 경관을 포괄하였다. 화면의 근경과 중경에서 잠두봉과 선유도(仙遊島)의 모습이 확인되며, 절제된 선묘와 수묵의 흑백대비 효과 등 절파(浙派) 화풍의 특징이 보인다.

한편 「미원계회도」는 드넓은 산수경관이 아닌 소속 청사(廳舍)의 모습을 부감시로 포착하고, 건물 내부에서 열린 계회 장면과 조합하였다. 이는 1570년대 들어 등장한 새로운 계회도 형식으로서 배경의 산이나 수목 표현에 16세기 중엽 이후 유행한 절파 화풍이 적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정사신이 참여해 제작한 6폭의 계회도는 제작시기와 참여자, 그리고 제작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회화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따라서 다양한 측면에서 가치를 지니며, 회화사적으로는 16세기 후반의 계회도 유형과 산수화풍의 전개상을 살펴보는 데 유용하다. 또한 한 인물이 지속적으로 참여한 계회의 면모를 일괄해서 보여주는 희귀한 사례이다. 아울러 정사신 개인의 이력은 물론 단편적으로나마 소속 관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계회도 연구」(윤진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4)
「16세기말(1580년대) 계회도 신례 ­정사신 참여 봉산계회도 등 6폭」(이원복ㆍ조용중, 『미술자료』 61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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