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결사는 고려후기 천태종 승려인 요세가 개창된 결사를 가리키는 종교용어이다. 백련결사라고도 한다. 1198년 천태종에 크게 실망한 요세가 신앙결사에 뜻을 두고 영동산 장연사에서 수행하였다. 1216년 전라도 강진의 토호인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의 지원을 받아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본격적으로 결사를 결행하였다. 점차 지방관과 최씨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고 1232년에 보현도량을 개설하여 대몽항전을 표방하였다. 불교의 실천성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계의 세속화와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163년(의종 17) 합천의 속현(屬縣)인 신번현(新繁縣)에서 호장(戶長)의 아들로 출생한 요세는 12세 때인 1174년(명종 4)에 천태종 균정(均定)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하였다.
23세 때인 1185년에 승선(僧選)에 합격하고 그 뒤 1198년(신종 원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高峯寺)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때 법회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 해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서 개당하고 수행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知訥)의 권유에 의해 수선(修禪)을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천태교관(天台敎觀)을 확고한 사상적 기반으로 하였다.
그가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 계기는 1208년(희종 4) 봄에 영암의 약사암에서 거주할 때이다. 이때 홀연히 생각하기를 “만약 천태묘해(天台妙解)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지적한 120병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연수가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에서 지적한 수행상의 제약을 극복하려면 천태의 묘해에 의지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특히 요세는 실천행을 강조했는데 그 방향을 수참(修懺)과 미타정토(彌陀淨土)로 인식하고 그 이론적 근거를 『법화경』에 바탕한 천태지자의 『천태지관(天台止觀)』,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와 지례(知禮)의 『관무량수경초(觀無量壽經鈔)』에서 찾았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요세는 1216년(고종 3) 전라도 강진의 토호인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의 지원을 받아 약사암에서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본격적으로 백련사 결사(白蓮寺結社, 약칭 白蓮結社)를 결행하였다.
이러한 백련결사는 1232년(고종 19) 보현도량을 개설함으로써 그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침략을 받아 거국적으로 저항하였는데 보현도량 개설은 이러한 사정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련결사의 결성 초기에는 지방의 토호층과 이들을 지지하던 민들을 주요 단월로 하였으나, 1220년대에는 주로 인근 지역의 지방관의 배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뒤 1230∼1240년대에는 최우(崔瑀)를 중심으로 하여 그와 밀착된 중앙 관직자, 그리고 많은 문신 관료층이 백련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1237년(고종 24) 여름에 이르러 왕이 75세의 고령인 요세에게 ‘선사(禪師)’의 직함과 함께 세찬(歲饌)을 내리기도 하고, 1240년(고종 27) 8월에는 최우가 직접 발문까지 지어 보현도량에서 계환이 해설을 붙인 『법화경』을 간행토록 지원한 조처는 이같은 사정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지원과 관심은 1240년대에 최자(崔滋)가 상주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관내 공덕산에 동백련사를 중창한 것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중창에 지역 토호들보다 관의 지원이 우선하였다는 것은 당시 백련사가 최우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그의 만년에 최씨정권과 유대를 가지게 된 요세는 1245년(고종 32) 4월에 천인(天因, 1205∼1248)에게 주법을 계승시키고, 원효의 ‘징성가(澄性歌)’를 계속 며칠간 부른 뒤 입적하였다. 향년은 83세이고 승랍은 70이었는데, 고종이 유사에 명하여 원묘국사(圓妙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중진(中眞)이라 하였다.
요세를 계승한 그의 문도들은 대표적인 인물로서 천인, 천책(天頙, 1206∼?)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지눌을 계승한 혜심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들로서 과거에 합격하여 세속적인 출세의 길이 열려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를 포기하고 요세의 문도로 백련사에 입문하여 요세 이후의 백련결사를 주도하였다.
이를 당시 유학자 또는 독서층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문벌체제 하에서 귀족적 · 보수적인, 또 무신체제하에서 부용적(附庸的)인 성격을 지닌 유학에 대한 회의와 반발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여겨진다. 이는 상대적으로 요세가 개창한 백련사가 보수적인 불교교단을 비판하고 출현한 것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관심의 표현이었다.
요세는 사상적으로 북송(北宋)의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사명지례(四明知禮, 960∼1028)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지례의 저술인 『묘종(妙宗)』을 즐겨 강의했다는 점과 또 그가 개창한 염불결사의 ‘청규(淸規)’를 본따 정진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중국 불교에서 송대에 이르러 교선일치사상이 현저히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선종 가운데 법안종 승려인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를 들 수 있다. 그에 의해 천태선, 화엄선, 염불선이 유행했으며, 이 중 염불선이 최고로 성하여 천태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천태종은 산가파, 산외파의 양파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산가파는 천태사상과 정토신앙의 결합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지례가 창시한 것이었다.
지례의 염불정토적 경향을 포용하는 불교관을 계승한 요세는 천태지자(天台智者)를 정통으로 삼고, 이를 토대로 하여 천태종의 전통적인 참법(懺法), 즉 지자가 찬한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1권)에 의거하여 철저한 수행을 행하였다.
요세는 법화참법에 의거해서 매일 지자의 지관수선법(止觀修禪法)인 천태선관을 하고 이와 더불어 『법화경』을 염송하고서, 그 여가에는 지자의 법화삼부(法華三部) 중 1부를 독송하고 준제신주(準提神呪)를 천 번, 미타불(彌陀佛)을 만 번 소리내어 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세의 실천적 면모는 백련사의 청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요세의 평소 생활태도를 “방장(方丈)에서 오직 삼의(三衣), 일발(一鉢)로써 생활했다”든가, “세상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개경의 땅을 밟지 않았고, 또 평소에 방석 없이 좌정하면서 거처에다 등불도 밝히지 않았으며, 형편이 닿는 대로 경전의 소요(疏要)를 찬하여 도중(徒衆)에게 반포한다든가, 시주들의 보시를 빈궁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 사실” 등으로 표현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요세가 개창한 백련사 결사의 사상적인 골격은 법화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대체로 보현도량 개창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지눌 계통의 수선사를 통해서 간화선의 경향에도 관심을 가진 바 있으나 천태선이 주를 이루었으며, 개창 이후에는 특히 염불정토관(念佛淨土觀)과 참회행(懺悔行)이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곧 요세의 불교관의 골격은 ‘법화삼매(法華三昧)’, ‘구생정토(求生淨土)’, ‘법화참법(法華懺法)’임을 알 수 있다.
요세가 지닌 불교관의 이론적인 배경을 천태종을 개창한 지자에게서 찾을 수 있고, 신앙면에서는 지례의 염불결사를 중시한 송초(宋初)의 신앙결사를 계승하고 있다. 한편, 요세가 입적하면서 며칠간 계속 불렀다는 징성가(澄性歌)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원효의 정토왕생사상까지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세의 불교관은 무신정변 이후 불교계에 대한 비판이 팽배한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미루어볼 때 이미 교단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과는 계통을 달리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요세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지자(智者)의 적손(嫡孫)’이라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백련결사는 초창기 지방 토호의 보시에 의해 유지되다가 1230년대에 이르러 최씨정권의 적극적인 지원과 후원을 받았다. 수선사(修禪社)와는 달리 1230년대에 와서야 백련사의 주요 단월로 최우정권이 부상한 까닭은 당시 몽고군의 침입에 대응하여 백련사가 대몽항전을 표방한 것에서 어떤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련사에서 1232년(고종 19) 4월 8일에 보현도량을 설한 것은 분명 대몽항전과 관련된 대응조처였으며, 이는 최우가 같은 해 6월에 단행한 강화천도(江華遷都)와도 연결되는 조처로 보인다.
한편 백련결사를 비롯한 신앙결사는 13세기 후반 이후 대몽항전기를 거치고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원간섭기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편의 결과 원에 예속된 정치적 현실 속에 타협하고 온존하려는 경향과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를 계승하면서 당시의 보수적인 성격을 비판하려는 경향으로 양분되어 나타났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불교계의 추세는 보수적 경향과 타력신앙적인 요소가 풍미하였다.
원간섭기 백련결사의 경우 개경에 원 황실의 원찰로 개창된 묘련사(妙蓮寺)가 표면적으로 백련결사의 계승을 표방하였으나 결사의 정신을 변질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 경향에 대항하면서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승려로 백련결사를 계승한 운묵(雲黙)이 있었다.
그는 14세기 초반기에 활약한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 그의 뚜렷한 행적은 알 길이 없다. 단지 그가 남긴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을 통해서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뿐이다.
이와 같이 고려 말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 감에 따라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 곧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사회의 향리층, 독서층이 획득한 사상사의 주도권을 주자 성리학이 대신하게 되었다. 주자 성리학이 고려 말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기반은 이미 무신정변 이후 사상의 변혁을 거친 불교계에 의해서 마련되었던 셈이다.
13세기 전후 우리나라 불교계의 양상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결사가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그 주도세력은 대부분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유교적 소양이 있는 독서층이라는 점이다. 곧 지방세력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사회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백련결사는 불교의 실천성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계의 세속화와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백련결사의 사상적 경향은 서민 대중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몽고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백련결사의 제1대 교주 요세의 경우 그가 표방한 불교관과 실천적인 수행의 모습을 통해서 볼 때, 고려 불교사에서 서민 대중과 가장 가깝게 호흡했던 불교지도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