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호는 수월(水月)이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일본 동경 하나코 지츠조(日名子實三) 조각연구소에서 조각을 공부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조각가로 활동했다. 1942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김광작’이라는 이름으로 「박군의 상」, 「와다나베씨의 상」을 각각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8ㆍ15광복 이후에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소녀 두상」을 출품, 특선하였으며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흉상」 으로 무감사 입선하였다. 한국근대기와 광복 직후의 우리나라 조각은 대체로 사실적인 인체조각인데, 김만술의 조각은 이러한 일반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약 2년 동안 경주예술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1956년에 신라불교조각연구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으며 대구효성여자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1957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경주지역에 각종 동상을 비롯해 다수의 공공조형물을 제작했다.
김만술의 순수미술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은 1947년에 제작한 「해방」이다. 젊은 남자가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어내고 있는 모습으로, 민족의 해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70cm 정도의 석고상(청동으로 주조됨)이지만, 인물의 받침대가 한국 지도의 형상이며 인물의 의지에 찬 얼굴 표정과 상체를 구부려 힘을 응축해서 밧줄을 끊으려는 듯한 자세는,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시각적으로 조형화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경주예술가협회가 주최한 ‘미군진주환영기념 미술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외에 순수조각으로 분류되는 작품으로는 「역사(力士) I」과 「역사(力士) II」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높이 3-4미터의 대작인데, 상체를 벗고 한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는 남성상으로, 「역사 I」에서는 횃불을 들고 전진하는 모습이며 「역사 II」는 망치를 들어내리치려는 모습으로, 산업의 역군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점의 조각상은 시멘트로 제작되어 있었으나 1999년에 덕수궁미술관에서 ‘한국근대미술: 조소-근대를 보는 눈’ 전시를 계기로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김만술은 주로 경주에서 활동하면서 김유신, 신사임당, 박목월, 김동리의 동상을 비롯하여 경북 일대에 동상, 충혼탑, 기념조형물을 다수 제작하였다.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박군의 상」 입선
1944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와다나베씨의 초상」 입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소녀 두상」 특선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흉상」 무감사 입선
1967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