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도판은 지관(地官) 또는 지사(地師)들이 묘지나 택지 선정 등 지질과 길흉을 판단할 때 필수적으로 지니고 다니는 도구이다. 나무판 사방에 방위를 그려놓고 그 가운데 자침을 달아 집터나 묘지를 잡을 때 방향을 결정하는데 사용하였다. 집터나 묘터를 점지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어서 조선시대에서도 풍수지리를 시험과목으로 하여 인재를 뽑았는데, 이들을 '상지관'이라 하며 궁궐이나 왕릉 점지와 같은 일을 하였다.
자침을 이용하여 방위를 알아보는 방법은 중국 한나라 때에 이미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천문학이 발달되고, 역법과 주역을 가르쳤던 삼국시대에 이미 방위를 보았던 윤도판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무덤에 사신도와 별자리가 그려진 것은 윤도판을 사용했다는 근거이다. 통일신라 말에 풍수도참사상이 발달하면서 윤도판이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지관들이 필수적으로 소지하고 다녔다.
둥근 목판 가운데 자침이 있고, 그 주위에 둥근 원을 그려 방위와 간지 등을 새겨 둔다. 크기는 직경 5㎝ 정도 되는 작은 것에서부터 약 30㎝ 정도 되는 큰 것도 있다. 두께는 얇은 것은 약 2.5∼5㎝ 정도이다. 작은 것은 대부분 뚜껑이 있으나 큰 것은 뚜껑이 없는 것이 많다.
윤도 상판의 자침 주위로 둘러지는 원을 층이라고 한다. 가장 안쪽의 1층은 8괘(卦), 2층은 8요(曜), 3층은 황천(黃泉), 4층은 12지(支), 5층은 24방위 등을 글자로 새겨두는데, 큰 것은 13층까지 되어있다. 팔괘는 팔요수 곧 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신(申)·유(酉)·해(亥)로 나누고, 이것은 다시 바깥 큰 원에서 12간지로 나뉘어져 각 칸은 2개씩 모두 24개의 봉침과 정침으로 나뉜다. 24개의 칸은 다시 그 바깥 원에서 한 조각이 4개의 눈금으로 나뉘어져 96칸이 되었다가 다시 바깥에서 240개로 나뉘어 다음 칸에서는 24절기로 나뉜다. 이 층수가 많을수록 윤도판이 크다. 일반적으로 지관들이 휴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12∼48방위로 되어있는 간단한 것이다.
윤도판을 만드는 사람을 윤도장이라고 한다. 먼저, 나무로 둥근 판을 만들어 중심부에 작은 원을 파내어 자침을 끼워 둔다. 몸체는 대추나무를 잘 말려서 사용하는데 뒤틀림이 적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간혹 윤도 윗판을 상아로 만드는 고급스러운 것도 있다. 윤도판 몸체를 금속으로 만들면 자침의 자성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속으로 만들지 않는다. 자침은 쇠바늘을 불에 달구어 남북을 가리킬 수 있도록 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중심에는 구멍을 뚫어 침에 걸 수 있도록 한다. 중심 침에 올려놓았을 때 좌우 중심이 맞아야 하고, 회전이 잘 되도록 한다. 자침은 자석에 15∼30분 정도 붙여두면 자성이 생겨 남북을 가리킬 수 있게 된다. 윤도의 상판 원과 방위 글자는 대부분 칼로 새겨두지만 붓으로 그리는 경우도 있다.
먼저 집터나 묘터를 정할 때 터의 중심에 윤도판을 놓고 자침이 걸리지 않고 남북을 가리킬 수 있도록 수평으로 놓는다. 자침이 남북으로 고정 되면 윤도판을 돌려 자(子)를 북쪽에, 오(午)를 남쪽으로 놓아 자침과 판의 자오선이 일치되도록 고정시킨다. 그 다음 실을 집짓는 방위에 따라 길게 연장하여 표시를 한 후 집터를 잡는다. 풍수에 따라 터를 잡는 일은 자연의 이치와 섭리를 근본 개념으로 하고 있다. 즉 자연의 법칙과 형상을 따름으로서 길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윤도판은 풍수지리에 따라 집터나 묘터의 방위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풍수지리설은 집(양택)과 묘지(음택)가 어떻게 자리잡느냐에 따라 자신과 자손에게 길흉화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도읍을 정하고 마을과 살림터를 꾸미는 것을 이러한 생각을 염두하고 점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