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현서원 소장 주자영정(朱子影幀)은 총 9점으로 각각 제작시기와 장황형식, 재료, 화면의 크기 등이 다르다. 초상화의 전체 목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작자미상, 「회암선생주문공유상(晦菴先生朱文公遺像)」, 1845년, 족자, 비단에 채색, 112.5×56.5cm
작자미상, 「회암선생주문공유상」, 1709년, 족자, 비단에 채색, 112.7×58.9cm
작자미상, 「회암선생유상(晦菴先生遺像)」, 족자, 비단에 채색, 97.0×46.2cm
작자미상, 「주자입상(朱子立像)」, 액자, 비단에 채색, 91.5×50.5cm
작자미상, 「문공회암주부자진상(文公晦菴朱夫子眞像)」, 액자, 비단에 채색, 84.5×47.2cm
전(傳) 안병문(安秉文), 「주자입상」, 1926년, 액자, 면에 채색, 105.9×54.1cm
작자미상, 「주자입상」, 액자, 비단에 채색, 78.5×49.5cm
작자미상, 「주자입상」, 액자, 비단에 채색, 78.4×46.9cm
전(傳) 안병문(安秉文), 「주자입상」, 1926년, 액자, 면에 채색, 106.8×55.0cm
충현서원(忠賢書院) 소장 주자영정(朱子影幀)은 총 9점으로,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장기간 동안 여러 화가에 의해 제작되었다. 『충현서원지(忠賢書院志)』에 의하면, 최초의 주자 영정은 1581년(선조 14)고청(孤靑)서기(徐起)가 중국의 남경(南京)에서 가져와 봉안했으나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서원을 중건하고 1712년(숙종 38)에 경기도 연천의 임장서원(臨漳書院)에 있던 영정을 모사해 와서 다시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1790년(정조 14), 서원을 중수할 당시 충청감사 정존중(鄭存中)이 감영 소속 화사(畵師)인 윤명택(尹命澤)을 보내 영정의 제작을 도왔다고 한다.
충현서원은 1871년(고종 8)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주자 영정은 공주향교 존경각에 이전 봉안하였다. 충현서원은 1925년, 원래 자리에 재건되었는데, 이듬해안병문(安秉文)에게 의뢰하여 새로운 주자 영정을 제작해 봉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6년공주향교에 있던 7점의 영정을 옮겨옴으로써 현재 총 9점이 함께 보관되고 있다.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은 2번 「회암선생주문공유상(晦菴先生朱文公遺像)」으로 생각되는데, 상부에 “회암선생주문공유상(晦菴先生朱文公遺像)”이라는 표제가 있고 여백에도 묵서가 있지만 화면의 훼손이 심한 편이다. 좌우 여백에 주자가 지은 화상찬(畵像讚)이 묵서되어 있는데, “숭정 갑신후 기축 후학 김진규 근서(崇禎甲申後己丑後學金鎭圭謹書)”라는 관서(款書)로 미루어 1709년(숙종 35)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가 쓴 것으로 생각된다.
반신상으로 그려진 초상화는 얼굴 부분에 비해 진한 먹으로 처리한 복건과 심의 부분의 손상이 심하다. 얼굴의 윤곽과 이목구비, 복식이 모두 같은 굵기의 선묘로 표현되었는데, 일정한 농도로 갈색을 펴 바른 안면이나 음영 표현이 없는 옷주름 등 18세기 초에 유행한 초상화법을 보여준다.
1번 영정은 얼굴 부분의 훼손이 심각한 데 비해 복건과 몸체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표제와 좌우 여백에 쓴 묵서는 서체만 다를 뿐 2번과 같은 내용이다. “숭정 갑신후 기축 시성삼을사(崇禎甲申後己丑始成三乙巳)”라 쓴 관서에 따르면 기축년(己丑年, 1709년)에 처음 조성하였고 1845년(헌종 11, 乙巳年)에 다시 그린 것이다. 선묘로 전체 형상을 잡았으나 복건과 심의의 전, 허리띠 등에서 음영 표현이 확인되어 19세기 전반의 초상화로 볼 수 있다.
5번과 3번은 모두 좌상(坐像)이지만, 주자의 용모나 화법에 차이가 있다. 5번 영정은 화면 구성이나 얼굴의 인상과 화법이 위의 1번과 2번 초상화와 상통하지만 전신좌상이다. 역시 가부좌 자세로 그려진 3번 영정은 표제가 우측에 있고, 상부에 원나라 문인 오징(吳澄)이 주자의 기상을 읊은 시문이 묵서되어 있다. 또한 대다수 영정과 반대로 우향(右向)한 자세이며 오른쪽 관자놀이에 있던 북두칠성 모양의 점도 왼쪽에 그려져 있다. 얼굴의 음영 표현, 옷주름에 잇대어 그은 갈색 선, 그리고 검은색 전과 끈의 윤곽에 덧그은 흰색 선 등으로 미루어 1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4번과 7번, 8번 영정은 모두 전신입상으로 도상이 일치할 뿐 아니라 규격도 비슷하다. 특히 7번과 8번은 심의의 옷주름에 묵선과 채색 선을 잇대어 표현한 점이 같지만, 8번 영정에 더욱 정돈된 필묵법이 쓰였고 얼굴의 음영 표현도 보다 뚜렷하다. 이에 비해 4번 유물에는 굵기의 변화가 있는 거친 필선이 구사되었고 안면의 음영 표현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모두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6번과 9번의 영정은 1926년에 지역에서 활동하던 화승(畵僧) 안병문이 그렸다고 전하는 전신입상(全身立像)으로, 20세기의 초상화법이 적용되어 있다. 두 작품은 서 있는 방향만 다를 뿐 같은 도상과 화법, 규격으로 이루어졌다. 얼굴의 굴곡과 옷주름을 나타낸 강한 음영 표현이 눈에 띄며, 입술 양 끝에 진한 홍색을 칠해 부피감을 냈다. 또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배경의 여백에도 채색을 가해 공간감을 살렸다.
공주 충현서원의 주자 영정 9점은 장기간에 걸쳐 제작된 작품들이 한 곳에 전해 내려온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또 다양한 형식과 규모, 화풍을 지니고 있어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 활용할 만한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