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중기에 애용된 계축(契軸) 형식으로 상부에 전서체로 “수문장계회도(守門將契會圖)”라 묵서한 제목, 그리고 중앙부의 계회 장면이 담긴 그림, 하단부의 좌목(座目)까지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그림의 크기는 세로 137.0㎝, 가로 64.5㎝이다.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201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수문장계회도(守門將契會圖)」의 제목과 좌목은 작품의 제작배경과 제작시기, 관련 인사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좌목의 첫머리에 “수문장청(守門將廳)”이라 쓰여 있어 계회도의 제작 주체를 알 수 있고, 이어서 품직, 이름, 자, 생년, 무과 합격연도, 본관, 거주지, 그리고 부친의 품직과 이름 등 19명의 명단이 정리되어 있다. 참석자는 강옥(姜沃, 1588∼?), 김충립(金忠立, 좌목에 기록 없음), 안수익(安受益, 1577∼?), 박준민(朴俊敏, 1586∼?), 성진창(成振昌, 1603∼?), 민태형(閔泰亨, 1593∼?), 김익견(金益堅, 1599∼?), 이영(李泳, 좌목에 기록 없음), 이익선(李益善, 1596∼?), 경유종(慶有宗, 좌목에 기록 없음), 윤중영(尹重榮, 1588∼?), 신영(申濚, 1597∼?), 김여효(金汝孝, 1601∼?), 신위망(申魏望, 1598∼?), 김영(金嶸, 1601∼?), 권항(權恒, 1575∼?), 윤훈(尹壎, 1585∼?), 김형(金珩, 1587∼?), 이구(李玖, 1592∼?) 등이다.
좌목을 통해 확인되는 출생연도와 『승정원일기』의 기사를 통해 안수익은 1627년(인조 5) 5월, 김충립은 1628년(인조 6) 5월, 김여효는 1629년(인조 7) 2월∼7월, 윤훈과 김영은 1629년(인조 7) 7월, 신위망은 1630년(인조 8) 6월, 성진창은 1631년(인조 9) 5월에 수문장을 지낸 사실이 확인된다. 또 거주지가 서울을 비롯해 해주, 울진 등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전 · 현직 수문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임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참여자들의 재임 시기로 미루어 1630년(인조 8)을 전후한 때, 즉 1627년(인조 5)부터 1631년(인조 9) 사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화면의 내용을 살펴보면, 근경에 모임 장소였던 한강변 잠두봉(蠶頭峯)이 자리하고, 중경의 넓은 물길과 모래톱 너머에 선유도(仙遊島)와 연산(連山)이 펼쳐져 있다. 잠두봉의 차일 아래 17명의 인물이 모여 있으며, 그 아래 뒤늦게 당도한 인물의 모습이 보인다. 구불거리는 필선과 수묵선염(水墨渲染)을 위주로 하면서 연한 담채를 곁들인 조선 중기의 산수화법이 적용되었다. 건물 지붕과 하녀의 옷, 탁자 등에는 적색을 사용했는데, 부분적으로 후대에 가채(加彩)하였다.
「수문장계회도」는 1630년경 한강변 잠두봉에서 열린 모임 장면을 담은 전형적인 계회도로서 원래 형식을 보존하고 있다. 또 현재까지 알려진 17세기 전반의 수문장청(守門將廳) 계회도 중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