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은 1778년부터 182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법호는 자운(慈雲)이다. 18세기 후반 도봉 유문(道峰 有聞)이 주석하던 은해사(銀海寺)를 거점으로 삼아 수화승으로 성장하였다. 1790년대에는 활동 범위를 통도사(通度寺)로 넓혀 사찰의 불화 및 단청 불사를 전담하면서 경상도의 대표적인 화승으로 거듭났다. 지연은 임한(任閑), 두훈(斗薰), 포관(抱冠) 등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한 선배 화승의 불화 형식을 따르는 한편 자신만의 특징적인 화풍을 구축하였다.
지연의 생몰년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아버지 이몽세(李夢世)와 어머니 서씨(徐氏) 사이에서 태어나, 화준(和俊)을 은사로 출가하여 도봉 유문(道峰 有聞)의 법맥(法脈)을 계승하였다. 1788년부터 1824년까지 경상도 일대의 불화 제작과 단청을 주도하였으며 은해사 보문암(普聞庵)을 창건하였다.
지연은 1778년에 포관(抱冠)이 주도하는 은해사 백련암 지장시왕도와 혜화(惠和)가 주관하는 보경사 삼장보살도에 보조화원으로 참여하면서 수련 기간을 보냈다. 1786년 지연은 은해사 거조암의 후불도인 영산회상도를 제작하면서 수화승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787년에는 돌아가신 부모와 은사를 위해 문수사 석조아미타불좌상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은해사는 지연의 법사인 도봉 유문과 동문(同門)들이 주석하는 곳으로 활동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지연 스스로도 1789년에 은해사 보문암(普聞庵)을 창건하면서 은해사에서의 입지를 높여 갔다. 이를 기반으로 지연은 1792년에는 희봉(僖峰)을 모시고 은해사 백흥암 감로도를 제작하고 1798년에는 은해사 법당 단청을 진행하였다.
1790년부터는 통도사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1792년 통도사 영산전과 세존 비각의 단청을 마무리하고 연이어 원적사 금봉암 신중도와 통도사 괘불도 및 삼장보살도를 제작하였다. 특히 통도사 괘불도와 삼장보살도 제작을 위해 지연은 화승만이 아니라 화주(化主)까지 겸임하면서 공덕주(功德主)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런 이유로 두 불화의 화기에는 지연을 자비화사(慈悲畵師)로 기록하고 있다. 1792년 불사 이후 1797년에는 운대사 아미타불회도를 제작한 후 1798년 통도사 명부전의 지장보살도와 시왕도를 제작하였다.
19세기 초에는 은해사 신중도(1800), 통도사 백운암 지장보살도(1801), 석남사 지장보살도(1803), 동화사 양진암 신중도(1804년) 등을 간헐적으로 제작하였지만 화승으로서의 활동은 급격하게 줄어든다. 이후 1818년에 퇴운 신겸(退雲 信謙)을 도와 백흥암 극락전 단청 불사를 마무리하고 1822년에는 수도사 괘불도 수리에 증명과 화승으로 활동하였다. 1824년에는 신겸이 필사한 묘법연화경의 시주질에 은해사 안흥암 승려로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지연은 은해사 안흥암(安興庵)에서 말년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지연은 임한, 두훈, 포관, 혜화 등 18세기 경상도에서 활동한 선배 화승들의 불화를 모본 삼아 그들의 화풍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자신만의 화풍을 모색하며 변화를 시도하였다. 먼저 상호는 이목구비를 크게 묘사해 인상을 밝게 표현하였으며, 석남사 지장보살도(1803)에서는 선악동자를 화면 전면에 배치하는 새로운 형식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지연이 그린 이 지장보살도는 19세기 후반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한 선악동자가 등장하는 지장보살도와 지장시왕도의 모본이 되었다. 지연을 도와 1798년 통도사 불사를 함께 했던 화승 가운데 옥인(玉仁), 계한(戒閑), 지한(智閑), 국성(國成) 등은 지연에 이어 19세기 전반 통도사에서 일어난 불화 조성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