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년(성종 2) 3월, 성종의 즉위를 보필한 공로에 대하여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정현조(鄭顯祖) 등의 논의를 거쳐 좌리공신을 선정하였다.
좌리공신은 처음에 1등으로 신숙주 · 한명회 등 9명을, 2등으로 이정(李婷) · 이침(李琛) 등 11명을, 3등으로 성봉조(成奉祖) · 노사신(盧思愼) 등 18명을, 4등으로 김수온(金守溫) · 이석형(李石亨) 등 36명으로 정하였다. 뒤에 구치관(具致寬)이 2등에 추가로 선정되었다.
1등 좌리공신(佐理功臣)에게는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2등 공신에게는 순성 명량 경제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3등 공신에게는 순성 명량 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4등 공신에게는 순성 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숙기(李淑琦)는 4등 좌리공신에 선정되었고, 이듬해인 1472년 6월 공신교서가 발급되었다.
재질은 저마(苧麻) 바탕에 종이를 배접하였고, 전체 문서의 크기는 가로 179.6㎝, 세로 27.5㎝이다. 목축(木軸)에 감긴 비단에 송설체로 쓴 두루마리 형태이다. 시면(始面)으로 ‘교(敎)’ 자를 먼저 쓰고 문서의 수취자를 기록하였다. 기두어(起頭語)는 ‘왕약왈(王若曰)’로 시작하며, 이를 대두(擡頭) 하였다. 본문 3행부터는 이숙기의 공훈에 대한 치사와 포상 규정을 기록하였다.
이어서 29행부터 52행까지는 좌리공신 1등부터 4등에 이르기까지의 공신 성명을 나열하고, 결사는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다 알아야 할 것이다[故玆敎示 想宜知悉].”로 맺고 있다. 마지막에는 문서 발급일을 명시하였고, 시명지보(施命之寶)를 날인하였다.
성종 추대와 관련된 정치적 동향과 참여자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원천 자료이자, 1471년 3월의 공신 책봉 때 누락되었던 구치관 및 이영은(李永垠)의 성명이 각각 첨가되어 있어 이들이 각각 2등, 4등 공신으로 추가 책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등 관찬사서에서 누락된 내용을 보완해주고 있다.
이 교서는 성종 때 내려진 공신교서로, 발급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15세기 후반 공신교서의 형태적 특징, 서체와 제작 방식 및 장정 형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성종을 추대한 정치 세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2018년 6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