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인(李宗仁)은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무신이다. 북병사 이제신 휘하의 군관으로 여진족 소탕에 참여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 휘하의 군관으로 일본군 척후병을 사살하였다.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전투 때는,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일본군을 다수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전투 도중에 전사하였다. 이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경상도 진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본관은 개성(開城)이다. 조선 태조의 부마인 호안공(胡安公) 이등(李䔲)의 후손이다. 『청구씨보(靑丘氏譜)』 권4 개성 이씨(開城李氏) 항목에서는 시조 이개(李開)에 이어 이등-이선(李宣)을 기록하고 후손으로 이종인을 수록하였다.
날쌔고 용맹스러워 비장(飛將)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후일 진주성 전투에서 함께 전사한 황진(黃進)과는 우의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고, 1583년(선조 16)에 북병사 이제신(李濟臣)의 휘하 군관(軍官)으로 있으면서 조선을 배반하고 금득탄(金得灘), 우을기거(于乙其車) 등에 소굴을 두고 생활하던 여진 부족을 소탕하는 데 참여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에 경상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의 군관이 되어 경상우도의 상황을 점검하던 일본군 척후병을 사살하였다. 1593년(선조 26) 4월 김해부사에 제수되었다. 그해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일본군이 진주로 들어오자, 이종인은 미리 성안에 들어가서는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등과 함께 수비책을 의논하였다.
일부에서 진주성 수비가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黃進) 등과 함께 방어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성내에서 수비하며 철추(鐵錐)로 성을 뚫으려는 일본군을 사살하였고, 진주성 동문이 뚫려 일본군이 개미 떼처럼 성벽에 붙어 올라오자 수하 병사들과 함께 육박전을 벌여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사살된 일본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적이 물러났다. 우의가 돈독하던 황진이 전사하자 시신을 수습하여 땅에 묻었다. 진주성의 서북문을 뚫고 진입한 일본군과 전투하는 과정에서 전사하였다. 이종인의 전사와 관련해서는 전투 중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내용과 진주 남강에 이르러 일본군 2명을 좌우 겨드랑이에 끼고 물속에 뛰어들어 사망하였다.
1593년 8월에 김천일, 황진, 김준민, 최경회, 장윤과 함께 포증(褒贈)이 결정되어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광해군 대에는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전쟁이 끝난 뒤 진주 정충단(旌忠壇)에 고종후(高從厚), 이잠(李潛) 등과 함께 모셔져 제향되었는데, 뒤에 아들 이득화(李得華)가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사당인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상언을 올렸다. 1652년(효종 3)에 진주에 충민사(忠愍祠)를 세워 제사지냈다.
1686년(숙종 12)에 세운 진주 촉석 정충단비(晋州 矗石 旌忠檀碑)에는 임진왜란 당시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사람들의 충절과 전공 등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