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영민해 7세 때부터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조식(曺植)이 한번 보고서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17세 때 용문산으로 조욱(趙昱)을 찾아가 학업을 닦고,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 이어서 1564년(명종 19)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에 보임되었다. 이어서 예문관검열 · 성균관전적 · 형조정랑 · 공조정랑 ·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선조가 즉위해서는 예조정랑으로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사헌부감찰 ·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오상상(吳祥常)이 신망해 사은사의 종사관으로 선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1년(선조 4) 울산군수로 나가 아전들의 탐학을 근절시키고, 백성들의 불편을 없애는 데 힘썼다. 1578년 진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펴서 공이 많았는데, 이 때 토호들의 모함으로 병부(兵符)를 잃고 벼슬을 사임, 향리에 은거하였다.
1581년(선조 14) 강계부사로 다시 등용되고, 이어서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1583년(선조 16) 여진족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되자, 패전의 책임으로 의주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는 행서 · 초서 · 전서 · 예서에 모두 뛰어났다. 1585년 경연관 이우직(李友直)의 특청으로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청백리에 책록되었다. 양근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저서와 작품으로는 『청강집(淸江集)』 · 『청강소설』 · 『진성잡기(鎭城雜記)』 · 「상붕남묘비(尙鵬南墓碑)」 · 「이현령인손묘갈(李縣令仁孫墓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