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상진삼청(均常賑三廳) 십칠공(十七貢)은 19세기 초반 균역청(均役廳), 상평청(常平廳), 진휼청(賑恤廳)에 소속되어 있던 17개의 공인(貢人)을 말한다. 본래 이들 아문은 조선 후기 급대(給代) 재원(財源) 운영과 기민 구제, 진휼 시행을 목적으로 한 독립된 기관이었으나 1648년(인조 26)에는 상평청과 진휼청이, 1753년(영조 29)에는 균역청이 각각 선혜청(宣惠廳)에 합속되었다. 3청이 선혜청에 합속되면서 이들은 본래의 임무 외에 공물을 조달하는 업무도 관장하였다. 이에 따라 3청은 일부 공물에 대하여 공인을 지정하고, 그들에게 값을 지급하여 중앙 관서의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3청은 17공을 통하여 새로운 재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균상진삼청 십칠공의 내용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균상진삼청 십칠공은 삼남화약계(三南火藥契), 삼남연환계(三南鉛丸契), 해서총약환계(海西銃藥丸契), 공사지계(公事紙契), 녹용계(鹿茸契), 호표피계(虎豹皮契), 구피계(狗皮契), 내궁방(內弓房), 봉상시(奉常寺), 전생서(典牲署), 장원서(掌苑署), 의영고(義盈庫), 선공감(繕工監), 상의원(尙衣院), 사재감(司宰監), 호조(戶曹), 공조(工曹) 등이다. 이 중 균역청에는 공사지계 1공, 상평청에는 녹용계, 호표피계, 구피계, 내궁방, 봉상시, 전생서, 장원서, 의영고, 선공감, 상의원, 사재감, 호조, 공조 13공, 진휼청에는 삼남화약계, 삼남연환계, 해서총약환계 3공이 소속되었다. 즉, 균상진3청 17공 중 대부분은 상평청 소속 공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공인들은 배속된 각 청으로부터 공물 값을 지급 받고, 지정된 관서에 공물을 조달해야만 했다.
17공이 3청으로부터 지급 받은 공물 값은 쌀 3,240석 2두 4승, 무명 14동 32필, 삼베 136동 20필 16척 2촌, 돈 335냥 2전으로 쌀로 환산하면 약 6,327석이었다. 선혜청에 소속된 57공에 지급되던 공물 값 약 217,251석에 비하면 재원 규모는 매우 작았다. 이 중 균역청이 1공에게 지급하는 공물 값은 약 400석, 상평청이 13공에게 지급하는 공물 값은 2,724석, 진휼청이 3공에게 지급하는 공물 값은 3,243석이었다. 진휼청은 균역청과 상진청에 소속된 공인의 수에 비하여 많은 공물 값을 지급하고 있는데, 이는 이곳에 배속된 공인들이 중앙과 지방의 군사 아문에 필요한 조총, 화약, 연환 등 군사 무기를 조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균역청의 공사지계와 상평청의 녹용계 등 13공은 한 차례 공물을 납품하는 '단기'로, 진휼청의 삼남화약계, 삼남연환계, 해서총약환계는 두 차례 나누어 공물을 납품하는 '2분기'로 구분되어 있다.
진휼청은 기근이 발생하였을 때,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치되는 임시 기구였다. 조선 후기에는 진휼 업무가 완료되면 진휼청의 명칭을 '상평청'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643년(인조 21)과 1644년(인조 22)에 전염병이 돌고, 1645년(인조 23)에 심한 가뭄으로 대규모 진휼이 시행되면서 상평청을 다시 설치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 논의의 영향으로 1648년(인조 26)에 상평청은 상설 아문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진휼곡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상평청을 상설화할 경우, 청사(廳舍) 유지에 따른 비용과 관원의 급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상평청을 선혜청에 합설하고, 선혜청 제조(提調)와 낭청(郎廳)으로 하여금 상평청 업무를 겸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선혜청에서 상평청과 진휼청의 재원을 관리하는 체계가 되었다.
1648년(인조 26) 상평청이 상설화되면서 진휼청의 업무는 상평청에서 주관하였다. 이후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대 대기근이 발생하면 임시로 진휼청을 설치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혁파하였다. 그러다 1686년(숙종 12)에는 진휼청을 상평청으로 이속하고, 선혜청의 속아문으로 편입시켰다. 즉, 상평청의 업무를 선혜청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진휼청의 업무 역시 선혜청에서 담당하였다. 상평청과 진휼청이 선혜청에 합속되면서 두 관청은 진휼을 위한 재정 확보뿐만 아니라 공물을 담당하는 기능도 겸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진휼 재원 확보를 위하여 공물의 일부를 쌀로 바꾸거나, 공물을 조달할 공인을 만들어[設貢] 공물 값의 일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난 대표적 공인으로는 1685년(숙종 11), 삼남월과연환계, 1704년(숙종 30), 삼남월과화약계, 1711년(숙종 37)에 해서총약환계 등 진휼청 소속의 3공이었다.
1750년(영조 26)에는 양역(良役) 부담의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은 종래 양인에게 수취하던 군포 2필 혹은 3필을 1필로 경감한 정책이다. 정부는 감필로 부족해진 세수를 보전하기 위하여 토지에 결전(結錢)을 부과하는 한편 어염선세(漁鹽船稅),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대동저치미(大同儲置米), 은여결(隱餘結) 등을 징수하고, 이를 전담할 기구로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였다. 균역청은 초기에 전의감(典醫監) 자리에 설치되었으나, 이듬해 남부 주자동의 옛 수어청(守禦廳) 자리로 옮겨갔다.
그런데 균역청을 독립된 관서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연간 1만 냥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경비 부담으로 인하여 1753년(영조 29) 정부는 진휼청의 선례에 따라 균역청을 선혜청에 합설하여 선혜청 당상이 균역청의 업무까지 겸관하도록 하였다. 1753년(영조 29) 이후 균역청은 상급 아문인 선혜청은 물론 속아문인 상평청, 진휼청과 상호 보완적인 재정 운영을 영위해 나갔다. 균역청의 설치로 '공사지계'라는 공인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균역청에서 사용되는 각종 공용 종이를 조달하는 공인이었다. 균역법 이후 존재하던 균상진삼청 십칠공은 1867년(고종 4), 『육전조례(六典條例)』가 편찬될 당시 상진2청(常賑二廳) 11공으로 줄어들었고, 1895년(고종 32)에는 폐지되었다.
조선 왕조의 국가 재정은 기본적으로 호조가 주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선혜청, 상평청, 진휼청, 균역청 등 여러 재무 기관이 설치되면서 재정 운영이 복잡다단해지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공물 업무는 호조 본연의 소관이었으나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로 선혜청이 담당하게 되었고, 17세기 중엽에는 상평청과 진휼청이, 18세기 중엽에는 균역청이 그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재정 기관이 난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상평청, 진휼청, 균역청을 모두 선혜청에 합속시켜, 일원적이고 통합적인 재정 체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균상진삼청 십칠공은 이러한 노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공물 조달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